소설 '대성당'과 '가게'로, 독서의 계절에 풍성함을 더하자.

문화산책/서평 2015.08.31 16:31

설을 맞아 세배하며 뜨거운 떡국을 삼켰던 날들

아름다운 만큼 짧았던 벚꽃

뜨거운 여름의 태양들도 이제는 그 맹렬함을 잃은 채

어느 덧 2015년도 단 4달을 남겨놓고 있다.

여러분은 올해 영양가 있는 음식은 많이 챙겨 드셨습니까

그럼, 영양가 있는 책들은 좀 읽으셨습니까?

나 또한 항상 시간이 없어서, 할 일이 많아서 책을 읽지 못했는데

두꺼운 책보다는 단편소설을 위주로 읽게 되면서 점차 그 양을 늘리게 되고 독서로 인한 재미도 두터워졌다.

지금부터 최근 읽었던 여러 단편소설 중에 가장 좋았던 두 권을 소개해보고 그 속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려고 한다.

 

첫 번째 소설은 레이먼드 카버(Raymond Carver)의 '대성당'이다. 이 소설은 20세기 후반 미국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시인이었던 레이먼드 카버의 자전적인 소설이다. 그는 1980년대에 미국 단편소설 르네상스를 주도했으며, ‘헤밍웨이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소설가’로 불린다. 목공소의 인부, 경비원과 같은 일을 전전하면서도 문학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던 그는 이 소설을 통해 역사에 남는 작가로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제 '대성당'의 줄거리에 대해 살펴보자. 

아내는 군 장교였던 전남편을 따라 유랑하는 삶에 지쳐 자살 시도까지 했던 외롭고 고독한 여인이다. 그녀의 유일한 친구인 맹인 로버트와 그녀는 10년 가까이 녹음테이프를 주고받은 친구사이이다. 그리고 스토리는 로버트가 나의 집에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나는 로버트를 맹인에 대한 선입견으로 보고 있고 그에 대한 아내의 태도 또한 못마땅하다. 저녁식사 후 아내는 잠에 들고 둘만 남은 나와 로버트는 어색한 대화를 이어나가다 우연히 티비에서 대성당을 보게 된다. 로버트의 부탁으로 ‘’나는 눈을 감고 그와 함께 대성당을 종이에 그리게 되고 뜻하지 않은 상황에 의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타인과 완벽하게 소통됨을 느낀다.

소설은 30 페이지 내외로 아주 짧은 편이다. 마음만 먹으면 전철 안에서도 다 읽을 수 있다.하지만 그 메시지는 그렇게 짧게 남아있지만은 않다. 맹인인 로버트와, 편견으로 가득 찬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작중화자의 극적인 교감은 서로 교감하고 소통하려는 의지조차 희미해진 우리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어떤 울림을 준다.

작중화자와 로버트는 그러한 교감을 대마초를 피우고 나서 경험하게 되는데, 실제로 레이먼드 카버가 대마초를 피웠었다는 점에서 좀 더 생생하고 몽환적인 간접경험을 독자들은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소설은 애드워드 P.존스(Edward P.Jones) '가게'이다. 작가는 워싱턴 D.C. 출신이고 1992년에 첫 번째 단편집 [Lost in the City]를 펴냈다. 흑인 노예 사를 소재로 한 역사소설인 장편 [The Known World]를 발표해 2004년에 퓰리처상과 전미도서 비평가상을, 2005년에 국제 IMPAC 더블린 문학상을 수상했 다. 2006년 발표한 두 번째 단편집 [All Aunt Hagar's Children]은 미국 흑인의 삶을 다룬 첫 번째 단편집과 등장인물과 주제 의식이 연관되어 있다. 현재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치고 있다. 이제 그의 작품 '가게'에 대해 살펴보자.

작중화자는 흑인이다. 그러한 이유만으로 아버지와 함께 수 년간 함께 일했던 인쇄소에서 다른 무능한 백인들에게 자리를 빼앗겼다. 그 후 새로운 직업을 찾던 와중에 한 슈퍼마켓에 지원하게 되었고, 힘든 일을 하며 그만두는 것을 고민하지만 그 때 마다 신기하게 일을 계속 할 만한 이유가 생긴다. 가게 일을 하면서 많은 동네주민들을 접하고, 심지어 손님 '켄터키 코너'와는 연인관계가 된다. 주인공은 점차 사장인 페니의 신뢰를 얻게 된다. 가게에 외상을 자주하는 단골인 터너의 딸을 페니가 차로 치는 불의의 사고를 일으키는 바람에 작중화자는 가게를 운영하게 된다, 점차 가게를 관리하는 것에 적응한 주인공은 직원들을 고용하나 가게 일로 인해 켄터키와 보내는 시간이 짧아져 둘은 결국 결별한다. 페니 또한 가게를 매각하기로 결정한다. 

작가는 과거 차별 받던 시대의 흑인들의 삶의 일상을 소설에 담아내었다.

신변잡기적이지만 그 속에 그 시대상을 절묘하게 녹아낸 점이 이 소설의 매력이다

 

그럼 이제 두 소설에서 공통적으로 다뤄지고 있는 어둠, '검음'에 대해 살펴보자.

 

먼저 애드워드 P.존스의 ‘가게’에 대해 살펴보자. 작중화자는 슈퍼마켓에서 일을 했던 젊은 흑인 청년이다. 소설이 시작되면서 그가 마주하는 사회적 차별의 장면은 도로 위 교통경찰에 의해서 시작된다. 무단횡단을 했다는 이유로 교통경찰은 작중화자를 혹독한 추위에도 불구하고 제2지구 경찰관할 구역을 계속 돌게 한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고작 무단횡단으로 작중화자는 죽음을 걱정하고 있다. 겨울날씨보다도 더 혹독했던, 그 당시의 유린된 흑인이 인권을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제발 집으로 갈 수 있길 기도하던 화자는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며칠간 집에서 칩거를 한다. 단순히 이야기하자면 무단횡단 때문에 죽을까 봐.

흑인들은 과거 신대륙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아니 노예 선에 끌려오던 순간부터 자신들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노예 신세였다

 

(출처 :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2572DC3455E400530D)

기록에 따르면 흑인들은 노예로서 신대륙에 오게 된 후 흑인노예를 신대륙에 보내는 일이 돈벌이가 되자, 일부 노예로 끌려온 흑인들은 다시 자신들의 본국으로 돌아가 노예상이 되기도 했다. 이처럼 흑인들은 다른 인종들과의 관계에서나 흑인들 사이의 관계에서 슬픈 역사를 만들어왔다. 하지만 그러한 고통의 역사 속에서 흑인들은 노예로서 정착하여 그 고통스러운 삶속에서 나름대로의 힙합, 레게 재즈 등과 같은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를 만들고, 그 것을 잃지 않으며 마치 한 겨울에 피어난 작은 떡잎을 보호하듯 그 자신들을 지켜 내었다. 그렇듯 흑인들은 자신이 선택한 문제가 아닌 단지 피부색이라는 부분에 의해 오랜 세월 핍박받아왔다.

흑인의 상당수는 '겸상 적혈구 증후군' 이라는 열성 상염색체 유전병의 유전인자를 가진 이형접합이다. 이 유전인자가 열성 순종이면 적혈구의 구조가 완전히 찌그러져서 만성적인 산소공급 부족과 체력 부족에 시달리게 되지만 잡종인 경우에는 일반인과 큰 차이가 없는데다가 적혈구에 말라리아 원충이 살기가 매우 힘들어져서 말라리아에 내성을 갖게 된다. 이러한 흑인의 종족적 특성은 말라리아와 천연두 등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던 아메리카 원주민 노예에 대한 대체재로 흑인을 선택하도록 하기에 충분했고 미국의 노예가 아메리카 원주민이 아닌 흑인이 되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흑인들의 강한 신체적 특성은 그들 각 개인들의 재능을 펼치지 못하게 한 채 주인의 노예로서 전락하게 만들게 된다. 신체적으로는 강했으나, 사회적인 힘은 여전히 약했다.

흑조(Black swan)에 대해 사람들이 신기해하고 놀라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든 생각이 있다

만약 흑조가 대부분이고 백조가 소수였다면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마찬가지로 세상에 흑인이 대다수이고 백인이 소수였다면, 백인들이 흑인과 같은 삶을 살았을 가능성 또한 농후하다. -이러한 가능성의 논리는 차치하고- 어쨌거나 흑인은 백인에 비해 신대륙에서는 소수였고, 특이하였으며 개개인의 신체적 힘은 강하였으나 정치적 힘은 없었다. 흑인에 대한 차별의 역사는 결국 다수와 소수의 문제로 귀결된다. 더불어 이 문제는 인간의 본능적인 색깔에 대한 선호에 따라 선호도가 비교적 높은 하얀색과 선호도가 비교적 낮은 편인 검정색의 대결결과에 따라 검은 피부색을 갖고 있는 흑인에게 더 불리한 조건을 더해준다. 결과적으로 흑인들은 사회적 소수로서, 더 불리한 조건으로의 삶을 살아왔다. 이러한 모습들은 현대에 와서는 많이 개선되어 왔지만 작중 상황에서는 여전히 차별이 존재한다. 대부분 검은색 글자를 찍어내는 인쇄소에서도, 검은 피부라는 이유를 가졌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인쇄소에서 해고당하듯 말이다.

흑인에 대한 차별의 역사는 미국이외에 다른 지역의 역사에도 찾아볼 수 있다.

과거 아프리카에서는 밤과 어두움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봤던 인식이 대대로 전해져왔고 동양에서는 흑인들을 오귀자(烏鬼子), '까마귀 귀신(혹은 괴물)' 이라고 불렀다. 비하하는 표현이라기보다는 애초에 그런 피부를 가진 사람을 본 일이 없었으니까 인간으로조차 여겨지지 않아 괴물, 즉 귀신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번에는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에 드러난 검음, 어두움에 대해 살펴보자. 검음을 바라보고 살아온 사람은 맹인 로버트이다. 그는 작중화자의 아내를 볼 때, 기차 안에서 허드슨 강의 풍경을 볼 때, 대성당이 나오는 다큐멘터리를 볼 때 그의 안구는 그 대상들을 향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한결 같이 어둠만을 보고 있다. 하지만 그가 갖고 있는 그 어둠의 시야는 결과적으로 작중화자의 시야를 어둠의 우주처럼 무한히 넓혀주는 역할 또한 하고 있다.

우리 인간은 근본적으로 어두운 것을 선호할까, 밝은 것을 선호할까?

어두운 사람보다 밝은 사람을 선호하듯, 얼굴에 생긴 다크서클을 제거하기 위해 미백크림을 덕지덕지 바르듯, 우리는 본능적으로 ‘밝음’을 추구해왔다. 이러한 이유로 피부색이 어두운 흑인들과 눈앞의 어둠만 볼 수 있는 맹인들과 같은 부류들은 도외시 되었고, 그 들을 향한 시선은 편견으로 가득 찼었다.

몇 년 전부터 다양한 동남아의 국가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로 인해 한국에서도 사회적인 문제들이 발생했다. 나 또한 학창시절에 ‘단일 민족’이라는 엉터리 민족 관에 대해 교육받았고, 도덕이나 윤리교과서에서도 다문화 가정이나 여러 다른 나라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것에 대한 교육을 받지 못했었다. 대한민국의 전반적인 사회적으로나 정책적으로도 그 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못하다 보니 그러한 사회적 문제가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 슈퍼마켓에서 근무하는 흑인청년과 맹인으로 대변되는 사회적인 소수 자들의 삶의 가치는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 재단되지 않는다. 그들의 삶은 거리에 핀 이름 모를 꽃들만큼이나 저마다 소중하고 소중히 여겨져야 할 가치가 있다.

미국은 영화 및 게임을 제작할 때 작품 등장인물이 전부 한 가지 인종으로만 구성되어있으면 불법' 이라는 소문도 있지만, 그것은 당연히 아니다. 다만 등장인물이 다 같은 인종이면 다양성을 해치기는 하니까 억지로라도 유색인종을 끼워 넣기는 한다. 이런 걸 토큰 블랙이라고 한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의 대중적인 드라마나 영화에는 다문화 배우들의 진입장벽이 높아 보인다. 이러한 모습이 아직까지도 경직된 우리사회의 소수문화에 대한 태도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무지개에는 빨간색도 있고 보라색도 있다. 흑인과 맹인으로 대표되는 소수계층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태도를 배양함으로써 앞으로 우리사회도 사회의 각 부분이 다양성으로서 인정되는 조화로운 사회가 되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런 사회가 어두운 세상을 계몽(Enlighten)시킬 수 있을 것이다.

 

안랩 대학생 기자 : 전영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