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산책/컬처리뷰

예술하는 습관, 예술가보다 작품에 집중하는 것

"난 매일 글을 써. 예술하는 습관이 있거든."

젊은 나이에 '최고의 영국 시인'이 된 '위스턴 휴 오든'을 연기하는 배우의 명대사이다.


<출처: 플레이DB>

이 연극은 극중의 극이다. 중학교 때 배웠던 지식을 다시 되새김질 하자면 '액자식 구성'이란 것이다. 노시인 위스턴 휴 오든과 노작곡가 벤저민 브리튼의 삶을 다룬 연극인 '칼리반의 날'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이야기를 담은 연극이다. 

'예술하는 습관'이 상영한 명동예술극장

 

즉, 오든 역을 맡은 배우가 대사를 하다가도 "아, 근데 작가 양반. 이건 좀 뭐뭐하지 않나?" 라고 하기도 하고 "난 배우입니까? 장치입니까?"라며 연기를 하다 회의를 느끼는 험프리 카펜터 역의 배우가 연기하다가 무대에서 뛰쳐나가기도 한다. 중간중간 무대감독과 그 스태프는 징징거리는 배우를 달래며 대본리딩 연습을 끝마친다. 대본리딩의 시작부터 끝이 곧 이 연극의 시작이고 끝이다.  

어려운 소재로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연극

제목만 보면 뭔가 어렵다. '예술하는 습관'

일단 예술이란 단어가 들어간다. 대충 줄거리를 읽어보니 실제 인물이었던 대시인과 대작곡가의 삶을 다룬 연극을 연기하는 연극이란다. 그 연극 이름도 '칼리반의 날'이다. 무슨 말인지 당최 알수 없다.

나름 책 쫌 읽었다고 자부했어도 그 읽었던 책 장르가 괴팍하게도 한 쪽으로 치우쳐진 관계로 어디서 이름은 들어봤지만 잘 알지는 못하는 오든이란 시인과 브리튼이란 작곡가에 대해 조명한 연극은 겁부터 줄지 모른다. 하지만 까놓고 이야기해보면 이 연극은 "어려운 소재를 쉽게 풀어낸 연극"이다.


<출처: 플레이DB>

아니, 솔직히 말하면 알고 가면 알고갈수록 재밌는 연극이고, 모르고 가도 재밌게 볼 수 있는 무난한 연극이란 것이다. 다소 지루하지 않을까라고 염려됐었다. 전날 밤도 샌 상태였고 다크써클이 역려한 상태여서 약간은 피곤했다. 하지만 이 연극은 유쾌했고 제목에서 풍기는 이미지의 반전을 꾀했다.

 

굳이 이 연극을 100% 이해해서 보고 싶다면 이 연극에서 다루는 인물인 오든과 브리튼에 대해 조사를 해보거나 관련 서적을 읽어보면 좋을 듯싶다. 이 연극을 보기 전에 읽어가면 좋을 책으로는 세익스피어의 <템페스트>, 엘런 베넷 <일반적이지 않은 독자>, 토마스 만의 <베니스의 죽음>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대중은 더 이상 날 좋아하지 않아" - 오든과 그를 연기하는 '피츠'

오든은 상당히 괴팍한 인물이다. 아니, 약해진 자신을 감추기 위해 괴팍한 성미로 자신을 포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승승장구하던 젊은 시절, 영국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받던 거는 이제 그저 시간에 맞추어 '성욕'을 해소하는, 씽크대에 오줌이나 지리는 쭈글탱이 노시인에 불과했다. 사람들은 그를 시를 읽지 않는다. 젊은 시절에 썼던 시를 읽었던,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에게 대학강의를 부탁하거나 인터뷰를 종종 요청한다. 오든은 그러한 것들을 몸서리치며 거부한다. 실제 오든의 전기 작가였던 카펜터가 오든을 인터뷰 하는 과정도 우습게 묘사해놨다.

나름 '많이 배운 사람'이라는 가방끈 긴 카펜터는 오든을 인터뷰하게 되는데 오든은 계속해서 동문서답만 하다가 난데없이 바지벗어! 라고 요구를 하게된다. 알고보니 오든은 험프리 카펜터를 자신이 시간에 맞춰 산 'Call boy'로 오인을 하게 된 것이다. 서로 옥신각신 하던 끝에 빨간 모자 쓴 Call boy인 스튜어트가 등장하게 됨으로써 인터뷰가 급하게 마무리된다. 


<출처: 플레이DB>

 

여기까지는 일단 배우들이 연기하는 '칼리반의 날'의 장면 일부분이다. 오든을 연기하는 배우 피츠는 이러한 장면을 연기 하면서 최연장자이면서 중년 배우를 포스로, 연습장 분위기를 주도한다. 그래서 작가에게도 끊임없이 요구하다 마찰을 일으키고 계속해서 철부지 같은 발언을 하게 된다. 이러한 피츠가 그가 연기하는 오든 캐릭터와 닮았다. 대본리딩 다음 스케줄인 CF 스케줄을 위해 연습을 빨리 끝내야 하는 그였다. 그래서 해결되지 않은 장면도 미루고 스텝에게 시계만 가리키는 모습은 유독 "시계가 없다면 그는 식욕도, 성욕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라는 오든과 겹쳐진다.

반면, 계속해서 "내가 이런 것을 연기한다고 하며 청중들은 날 싫어하진 않을까?" 걱정하며 대본의 수위를 조금이라도 낮추려고 떼쓰는 그는, 대중들의 외면을 맞이한 오든과는 대조된다. 

"난 유혹당했지, 유혹한 것이 아니야" - 브리튼과 그를 연기하는 헨리

'오든과 브리튼'은 영국 출신의 세계적 예술가다. 동시에 두 사람은 동성애자다. 같은 동성애자라도 오든은 싱크대에 오줌 싸고 소리나 떽떽 지르는 성질 더러운 동성애자였다면 브리튼은 우아하고 조용하면서 어린 남자아이에게 성욕을 느끼는 동성애자였다. 한때 과거 두 사람이 합작한 오페라의 실패로 헤어졌던 이 둘은 브리튼이 오든의 집에 방문하게 되면서 서로의 예술적 가치관과 고뇌 등에 대해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출처: 플레이DB>

 

브리튼은 자신이 현재 쓰는 오페라가 자신의 성적 취향과 연결돼 대중의 비난을 받게 될까 봐 작품에 집중을 못하고 있는 상태다. 그래서 오든을 찾아온 것이다. 오랜 친구로서, 그리고 최고의 작사가였던 오든의 거침없는 격려를 받기 위해서.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냉정한 지적과, "내가 가사를 붙여줄게. 우리 다시 한번 뭉치면 크게 성공할 거야"라는 말뿐이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오든이 냉정하고 거침없이 브리튼의 소아성애를 지적하고 브리튼은 끝끝내 자신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그 애가 자신을 유혹한 것이라며 괴로워한다. 그리고 이윽고 자신은 새 오페라를 위해 격려를 받기 위해 찾아온 것인데 잘못 찾아온 것 같다며 문을 박차고 나가버린다. 오든은 한참 생각한 끝에 외친다. "브리튼! 계속 해! 그들이 뭐라 하건 간에! 니가 하고 싶은 것을 해!" 라고 말이다.  

분명 오든과 브리튼의 삶을 다룬 '칼리반의 날'이지만 인물의 비중은 오든에 70% 이상 기울어져있다. 이것을 연기하는 헨리 역시 피츠에 밀려 2인자의 역할을 톡톡히 보여준다. 연극 내내 자신의 주장을 어필하고 작가와 대립하는 피츠와 달리, 헨리는 중간중간 연극에 대한 조언을 해도 금방 묵살당하고 만다. 

예술은 심오한 영감이 아닌, 일상 삶에서 나오는 것

두 예술가의 삶을 다루고 그들의 대화를 연극의 소재로 다뤘다고 해서 예술과 관련된 심오함이 대화에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저속한 단어들로 가득하다. 심지어 위대한 두 예술가를 동성애자로 등치시켜 '사회적 소수자'에 불과함을 보여줬다. 

시대 최고의 예술가라고 불리는 그들이지만 '동성애자'인 이상 영원한 비주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예술적 창조의 원동력으로 삼고 난 뒤 휴지처럼 버려버린 콜보이와 어린 소년들은 그들 자신이라고 보아도 큰 무리가 없다.    

두 예술가가 주인공이었지만 극의 마무리는 결국 그들의 대화에서 소외당했던 콜보이인 스튜어트다. 즉, 궁극적으로 '칼리반의 날'에서 '칼리반'을 가리킨 것은 스튜어트란 말이 된다.


<출처: 플레이DB>

전체적인 맥락으로 봤을 때 극중극
'칼리반의 날'이라는 제목은 세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의 밀려난 인물 '칼리반'과 이어지며 작가가 의도하는 바를 더욱 명백하게 말해준다. 극중극의 인물들도, 그 극중극을 만들어가는 배우들과 스태프도 조금씩 자신의 자리에서 밀려나있다 

 

"기념비로 기억되는 대가들을 뚫고 자라나는 무화과 나무처럼." 

콜보이는 끝끝내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자신의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했던 '칼리반'이라는 존재를 부각시키며 끝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콜보이를 통해 자신의 섬을 빼앗긴 칼리반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고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

이는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 대해 논하면서 주인공 프로스페로의 노예이자 돌연변이인 칼리반을 내세웠던 오든의 장시 바다와 거울'을 환기시키는 극적 장치다. 작품 속에서 항상 주변부적 존재에 관심을 기울였던 예술가들이 정작 삶에선 왜 그토록 냉정했던 걸까. 영국이 자랑하는 두 거장의 삶을 파고들면서 작가 베닛이 아프게 박아놓은 쐐기다 


<출처: 플레이DB>

 

연극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예술가의 작품보다 그 명성이나 사생활에 더 탐닉하는 우리 시대 예술에 대한 우아한 풍자를 펼친다. 사람들은 예술가의 명성을 소비할 뿐 그들이 생산하는 예술은 제대로 음미하지 않는다. 어쩌면 '진짜 예술'을 음미할 수 있는 사람은 적다. "어느 작가를 좋아하세요?"란 질문이 무의미해질 수 있다. 진짜 예술을 음미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책을 좋아하세요", "어느 음악을 좋아하세요"라고 물어야 하는 것이 어쩌면 예술을 하는 궁극적인 스타트가 아닐까. Ahn

대학생기자 김마야 / 아주대 경제학과


'삐뚤어질 수 있으니 청춘이지'라고 항상 스스로 되새기곤 합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어른'이란 인식이 사회에 맞춰가는 바른 상(像)이라면
저는 아직까지는 사회를 남들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청춘'이고 싶습니다. 저는 오늘도 제 청춘을 버라이어티하게 디자인하는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