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을 생각하게 한 김용택의 수필집 '인생'
요즘엔 상당한 양의 유행어, 외래어, 은어, 외국어가 우리 생활과 함께 한다. 아름다운 우리말이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진다. 정겨웠던 시골의 모습과 여유롭던 사람들도 사라진 지 오래다. 경쟁과 산업화 속에 바쁘고 빽빽한 도시의 모습만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다. 이런 변화를 맞다 그르다 판단할 순 없지만 그리움과 아쉬움, 소외감과 불안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많아지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은 더욱 소중하다. 그는 아름다운 고유어와 시골 풍경을 정겨운 언어로 표현한다. 섬진강 주변에서 평생을 먹고 자란 그의 시골 마을과, 강물에 씻긴 모래알같이 정갈한 그의 생각을 볼 수 있는 수필집 '인생'을 소개한다.
<출처: 다음 책>
자연과 함께한 인생
'자고 일어나면 달려들고 오르던 산과 강은 거기 그대로 있으되 이제 옛날의 맑은 강과 고운 산이 아니다.
...(중략)...
어느 날 문득 세수를 하려고 강물에 엎드렸을 때 내 얼굴이 흐려 보였다. 거울이, 인간의 거울이 더러워진 것이다. 그 얼마나 오랜 세월 산이 거기 있었고 강이 거기 있었던가. 사람들이 거기 그렇게 있었던가.'
김용택은 섬진강 주변에서 평생을 살았다. 그래서 그의 책에서 항상 빠지지 않는 것이 그가 자란 마을의 모습이다. 강변에서 풀을 뜯고 노니는 소들, 푸른 풀과 아기자기한 꽃들이 피어난 논밭과 길 주변, 그리고 그 속에 살아가는 섬진강 사람들. 그의 책을 읽으면 나는 어느새 그 마을사람이 되어 있다. 그리고 그속에서 자연을 체험하고 시골 사람들의 깨끗한 마음까지 배운다.
그런 자연의 모습이 점점 사라진다는 점을 작가는 지적한다. 위에 인용한 책 구절을 보면, 김용택은 강물이 흐려짐을 느낀다. 그리고 자연이 먼저 있었을까, 사람들이 먼저 있었을까 의문을 던지며 글을 마친다. 자연과 사람 누가 먼저일까? 지배하는 세력이 먼저일까, 앞서 뿌리 내린 세력이 먼저일까. 김용택은 강물은 인간의 거울이라 하였다. 자연은 인간을 비추고, 인간은 자연을 바라보기 때문에 거울이라 했을 것이다. 이 둘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서열을 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흐려진 강물이라는 시어가 우리 주변을 되돌아보게 한다.
'난로 위에는 물이 끓고 창밖에는 눈이 옵니다'
'어떤 선생님은 고구마를 우리들 맘대로 구워 먹을 수 있게 했지만 어떤 선생님은 절대 금지였다. 아무리 선생님이 금지를 시켜도 우리들은 고구마를 구워 먹었다.
...(중략)...
난롯불이 너무 뜨겁기 때문에 함부로 고구마 자른 것을 올리고 내릴 수 없어서 우리들은 조금 굵은 철사 꼬챙이를 만들기도 했다. 짓궃은 아이들은 그 철사 꼬챙이로 아이들이 구워 놓은 고구마를 잘도 낚아채다 먹었다.'
'인생'에는 어른들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글이 많다. 그 중 하나가 '난로 위에는 물이 끓고 창밖에는 눈이 옵니다'이다. 이 글에는 어렸을 적 난로 위에 고구마를 구워먹던 시골 아이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스마트폰과 게임으로 시간을 보내는 요즘 아이들에겐 고구마 구워 먹기는 위험한 장난일 뿐일 것이다. 과거 시골 아이에겐 이것도 하나의 '놀이'였다. 난로 위에 올려놓아 늘 바닥이 탄 밥을 먹던 시절, 눈싸움 후 젖은 옷을 말리다 양말이 타 엄마에게 혼이 났던 기억. 시골 아이에겐 이런 아름다운 추억이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선생을 하는 것이 시를 쓰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
'시 쓰는 일과 선생 하는 것 중에서 하나만 선택하라고 하면 어떤 것을 선택하겠느냐'
'선생을 하는 것이 시를 쓰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
이 두가지 질문은 나를 찾아온 사람들의 한결 같은 질문이다.
(중략)
책을 통해서 세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믿는 인생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를 터득한 것이다. 나는 지식으로 얻어지는 새로움으로 자연을 이해하고 세계 질서를 내 삶으로 구체화했던 셈이다. 글을 쓰는 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내게 주어진 순간들이 중요했고, 그 순간을 확실한 내 삶의 '현실'로 현실화했던 것이다. 글을 쓰는 일은 그 나중의 일이었다.
이 책에서 가장 감명 받은 글은 바로 '시인과 선생님'이다. 우리는 누구나 인생이라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그림의 목적은 잊고 그려야 한다는 마음의 굴레에 매여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또 미래의 자신을 지금의 자신에게 희생시키기도 한다. 주객이 전도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혹은 그렇게 살아왔던 사람들에게 작가의 삶은 일침을 준다.
글 쓰는 일을 자신의 삶을 확실시하는 수단으로 올곧게 사용하는 것, 현실에 충실히 하는 것, 그리고 자연을 통해 얻은 지혜를 내 삶으로 끌여들여오는 것. 말은 쉽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인생의 지침을 시인은 실천하고 있다. 앞으로 잊고 살지 말자고 다시 굳게 다짐을 해본다.
'인생'은 정말 얇은 책이다. 하지만 그 얇은 책 속에 시인의 광활한 삶이 있다. 아름다운 자연과 사람이 있다. 읽으면 읽을수록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되고 생생한 감동이 느껴진다. 작가의 삶과 생각이 한 권의 아름다운 문학으로 깊은 여운을 주는 것처럼 우리 각자의 삶도 그 자체로 아름다운 한 편의 에세이다.
책을 읽고 자신에게 두 가지 물음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나의 삶보다 타인의 삶에 익숙하진 않았는가. 지금 나에겐 '인생'을 생각해볼 여유가 필요하진 않은가.Ahn
대학생기자 고은정 / 경희대 전자전파공학과
성공은 자주 웃고 많이 사랑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