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랩人side/안철수 창업자
안철수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은"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0. 13. 07:00
이 사람만큼 '융합' 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 또 있을까?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과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의 수장으로서, 청춘콘서트의 주역으로서 바쁜 일정을 보내는 안철수 교수.
그는 창업자로서 매년 8월 말 열리는 안철수연구소 전사 교육인 '안랩 스쿨'을 찾아 강연을 한다. 상상 이상으로 바쁜 일정 속에서 올해도 어김없이 '안랩 스쿨'을 찾은 그는 시골의사 박경철 원장, 방송인 김제동씨에 대한 이야기로 가볍게 시작했다.
"박경철 원장은 아저씨의 탈을 쓴 여고생이에요. 조금만 슬퍼도 눈물을 흘리는 예민한 감수성의 소유자이지요. 김제동씨와는 이런 일이 있었어요. 강의를 다닐 때 사람들이 알아보고 사인해 달라고 하면 쑥스럽다고 했더니 '아직 연예인 수준은 아니다.'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MBC스페셜 녹화하러 홍대 앞에 같이 갔는데 사람들이 저한테만 사인해 달라고 몰려서 김제동씨가 당황해했던 기억이 있네요. (웃음)"
이어서 개인과 안철수연구소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자신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은 사회와 업계에 대한 부채의식이라고 밝혔다. 다음은 주요 내용. 색깔(좌파, 우파) 논쟁을 아직도 하고 있는 유일한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다. 만약 교육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입장이고, 경제에 대해서는 진보적인 입장을 취한다면 그 사람은 보수인가? 아니면 진보인가?
공정한 사회는 최소한 출발선이 같아야 하고, 경쟁 과정이 공정해야 한다. 그래야 떨어진 사람도 수긍할 수 있다. 그리고 떨어진 사람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이 필요하다.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은 '부채의식'이다. 의대 다닐 때 구로동이나 무의촌에서 봉사 활동을 했던 것, 7년 동안 V3를 무료 보급한 것, 의학 연구를 접고 안철수연구소를 창업한 것은 사회에 대한 부채의식이었다.
사회 구성원이 각자의 역할을 다해주었기 때문에 내가 학생 시절 의대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처럼, 세상을 살아오면서 여태까지 나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을 어떻게 갚을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의대 시절 의료 봉사 활동을 시작했고 이것이 바이러스 분석 및 무료 백신 제작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내가 만든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것, 여기서 개발자로서 가장 큰 보람을 느꼈다.
생활인으로서 할 수 있는 도전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모두 그만두고 당장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하는 일은 유지하고, 퇴근 시간이나 주말 여가 시간을 기꺼이 할애해 다른 분야의 전문성을 키우는 것이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도전이다. 여러 분야의 전문성을 모두 키운 후, 그 중 자신에게 맞는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것이다.
선택을 할 때 절대 남과 비교하지 말고, 어려움이 있을 때는 뒤나 아래를 바라보면서 여태까지 내가 해온 일을 살펴보면서 내가 아무것도 이룬 게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계획을 세울 때는 원대한 계획이 아니라, 계획을 잘게 쪼개야 하고, 그 계획을 달성했을 때는 자신에게 선물을 주는 등의 보상도 꼭 필요하다.
1999년은 CIH 바이러스 대란, Y2K 바이러스 이슈가 있었고 '벤처 95% 망한다'는 발언으로 평생 먹을 욕을 다 먹었다. 내 밥그릇 챙긴다는 소리 안 들을 때 말할 수 있어야 그것이 신뢰를 얻는다. 눈먼 돈이 벤처로 흘러드는 때였고, 투자가 아닌 투기에 뛰어든 사람들이 손해를 보면 결국 벤처나 산업계가 망가질 것을 아는 사람은 알고 있었다.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금기시되던 때 금기를 깬 것은 업계에 대한 부채의식 때문이다.
근래에 중소기업이 대기업에 종속되는 것을 '동물원'에 비유해 비판하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B2B 거래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불공정한 거래 관행을 누군가는 말해야 한다. 안철수연구소가 동물원에 갇히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어느 한 대기업에 치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연 단위 계약이라는 수익 모델을 만든 것도 주효했다. 이 모델을 처음 만들고 고객을 이해시킬 때는 매우 힘들었지만 이제는 보안 업계에서 당연한 것으로 자리잡았다.
안철수연구소를 경영할 때 가장 기뻤던 순간은 2004년 안철수연구소가 규모나 매출액 등에서 비교도 할 수 없는 굴지의 대기업들과 함께 '존경받는 10대 기업'에 뽑혔을 때이다. '드디어 과정에 대한 평가를 받았구나' 생각했다. 의미 있는 일의 결과로 돈을 버는 것이 기업이다.
회사 경영이 잘되고 있을 때 사임한 것도 부채의식 때문이다. 다른 중소/벤처 기업이 어려운 것을 보면서 우리 회사만 잘되는 것에 안주할 수는 없었다. 쉬운 길로 가지 않고 토플, GMAT 다 보고 와튼스쿨에 입학했다. 경험을 체계화하고 지식 저변을 확대해야 남을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Ahn
6월 29일 열린 대전 청춘콘서트
"박경철 원장은 아저씨의 탈을 쓴 여고생이에요. 조금만 슬퍼도 눈물을 흘리는 예민한 감수성의 소유자이지요. 김제동씨와는 이런 일이 있었어요. 강의를 다닐 때 사람들이 알아보고 사인해 달라고 하면 쑥스럽다고 했더니 '아직 연예인 수준은 아니다.'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MBC스페셜 녹화하러 홍대 앞에 같이 갔는데 사람들이 저한테만 사인해 달라고 몰려서 김제동씨가 당황해했던 기억이 있네요. (웃음)"
이어서 개인과 안철수연구소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자신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은 사회와 업계에 대한 부채의식이라고 밝혔다. 다음은 주요 내용. 색깔(좌파, 우파) 논쟁을 아직도 하고 있는 유일한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다. 만약 교육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입장이고, 경제에 대해서는 진보적인 입장을 취한다면 그 사람은 보수인가? 아니면 진보인가?
공정한 사회는 최소한 출발선이 같아야 하고, 경쟁 과정이 공정해야 한다. 그래야 떨어진 사람도 수긍할 수 있다. 그리고 떨어진 사람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이 필요하다.
사회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의료 봉사, V3 무료 보급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은 '부채의식'이다. 의대 다닐 때 구로동이나 무의촌에서 봉사 활동을 했던 것, 7년 동안 V3를 무료 보급한 것, 의학 연구를 접고 안철수연구소를 창업한 것은 사회에 대한 부채의식이었다.
사회 구성원이 각자의 역할을 다해주었기 때문에 내가 학생 시절 의대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처럼, 세상을 살아오면서 여태까지 나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을 어떻게 갚을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의대 시절 의료 봉사 활동을 시작했고 이것이 바이러스 분석 및 무료 백신 제작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내가 만든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것, 여기서 개발자로서 가장 큰 보람을 느꼈다.
생활인으로서 할 수 있는 도전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모두 그만두고 당장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하는 일은 유지하고, 퇴근 시간이나 주말 여가 시간을 기꺼이 할애해 다른 분야의 전문성을 키우는 것이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도전이다. 여러 분야의 전문성을 모두 키운 후, 그 중 자신에게 맞는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것이다.
선택을 할 때 절대 남과 비교하지 말고, 어려움이 있을 때는 뒤나 아래를 바라보면서 여태까지 내가 해온 일을 살펴보면서 내가 아무것도 이룬 게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계획을 세울 때는 원대한 계획이 아니라, 계획을 잘게 쪼개야 하고, 그 계획을 달성했을 때는 자신에게 선물을 주는 등의 보상도 꼭 필요하다.
업계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쓴소리 계속
1999년은 CIH 바이러스 대란, Y2K 바이러스 이슈가 있었고 '벤처 95% 망한다'는 발언으로 평생 먹을 욕을 다 먹었다. 내 밥그릇 챙긴다는 소리 안 들을 때 말할 수 있어야 그것이 신뢰를 얻는다. 눈먼 돈이 벤처로 흘러드는 때였고, 투자가 아닌 투기에 뛰어든 사람들이 손해를 보면 결국 벤처나 산업계가 망가질 것을 아는 사람은 알고 있었다.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금기시되던 때 금기를 깬 것은 업계에 대한 부채의식 때문이다.
근래에 중소기업이 대기업에 종속되는 것을 '동물원'에 비유해 비판하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B2B 거래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불공정한 거래 관행을 누군가는 말해야 한다. 안철수연구소가 동물원에 갇히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어느 한 대기업에 치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연 단위 계약이라는 수익 모델을 만든 것도 주효했다. 이 모델을 처음 만들고 고객을 이해시킬 때는 매우 힘들었지만 이제는 보안 업계에서 당연한 것으로 자리잡았다.
안철수연구소를 경영할 때 가장 기뻤던 순간은 2004년 안철수연구소가 규모나 매출액 등에서 비교도 할 수 없는 굴지의 대기업들과 함께 '존경받는 10대 기업'에 뽑혔을 때이다. '드디어 과정에 대한 평가를 받았구나' 생각했다. 의미 있는 일의 결과로 돈을 버는 것이 기업이다.
회사 경영이 잘되고 있을 때 사임한 것도 부채의식 때문이다. 다른 중소/벤처 기업이 어려운 것을 보면서 우리 회사만 잘되는 것에 안주할 수는 없었다. 쉬운 길로 가지 않고 토플, GMAT 다 보고 와튼스쿨에 입학했다. 경험을 체계화하고 지식 저변을 확대해야 남을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Ahn
사내기자 권서진 / 안철수연구소 품질보증팀 주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