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각국의 문화에 정통한 인류학자를 초빙하여 반도체 칩을 개발하고 있다."
낭만에 젖어 죽어가는 인문학 부활에 사명감을 불태우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얼마 전 인텔은 '상호작용 경험연구소'라는 조직을 설립하고 세계 각지 사람들의 전자기기 사용 방법 및 습관을 면밀히 분석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분석된 자료들은 엔지니어에게 전달되어 새로운 반도체 칩과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데 활용된다.
세계 굴지의 철강 업체 포스코에서도 이와 유사한 시도를 한다. 이 회사는 문과와 이과를 아우르는 이른바 '통섭형 인재'를 육성하겠다는 방침에 따라 인문학도 2, 3학년 학생들을 인턴으로 채용하여 현장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돕는 크로스 오버 채용 프로그램을 도입하였다. 또한 엔지니어들이 창의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적 소양을 쌓는 일이 필수라 판단하고 한 달에 두 번 철학과 역사, 미술 등 다방면에 걸친 인문학 강좌를 연다. 감성 마케팅을 펼친 팬택앤큐리텔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융합 문화 도입에 누구보다 앞장서 온 애플은 인문학을 통해 얻어진 그들만의 독특한 가치를 제품에 훌륭히 녹여냈다는 평가를 받으며 오늘날 IT 산업의 역사를 새로 써내려가고 있다.
이처럼 융합이라는 거대한 파도를 등에 업고 최근 각 산업에 몰아닥치는 변화의 물결을 보면 단순한 트렌드의 변화를 넘어 가히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싶다.
매년 1박 2일 과정의 '안랩 스쿨'을 개최하는 안철수연구소는 이러한 흐름에 발 맞추어 올해 키워드를 '융합'으로 정했다. 초청된 명사는 '오리진이 되라'의 저자인 세라셈 강신장 부회장, MBC 드라마 '조선왕조500년'을 집필한 신봉승 극작가, SNS 상에서 하이컨셉하이터치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정지훈 관동의대 IT융합연구소장. 이 가운데 'IT의 미래와 융합'이란 주제로 열띤 강연을 펼친 정지훈 소장의 강의를 소개한다.
역사적으로 새로운 시대의 패러다임 뒤에는 항상 그 변화를 이끌어낸 원동력이 존재한다. 가령, 과거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전환이 이루어진 배경에는 에너지 전환 기술이 있었다. 증기기관으로 대표되는 에너지 전환 기술의 혁신적 발전으로 인해 잉여 노동의 확보가 가능하게 되었고, 여기서 발생한 노동력은 공장에 투입되어 산업사회의 탄생을 촉발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한편, 산업사회에서 지식정보사회로 넘어가는 단계의 원동력으로는 정보의 전환 기술을 들 수 있다. PC와 같은 정보처리 기기를 통해 물리적 정보 및 지식들은 디지털 형태로 표현 가능하게 되었다. 이렇게 디지털화한 정보들은 시공간의 제약을 초월하여 확산되었고, 이 덕분에 인류는 비약적 기술 진보를 이루었다.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소프트웨어 두 가지를 꼽자면 워드와 스프레드시트를 들 수 있다. 워드는 문서를 작성하기 위한 소프트웨어이고, 스프레드시트는 회계 처리를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이처럼, 이 시기까지만 해도 기술의 중심에는 사람이 아닌 문서가 있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급변하는 패러다임을 이해할 수 있는 핵심 축은 무엇일까? 이와 관련하여 미래학자 다니엘 핑크(Daniel Pink)는 그의 저서 '새로운 미래가 온다'에서 다가오는 시대를 개념 시대(Conceptual Age)라 규정하고,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을
High Concept - 자신의 생각을 감성과 엮어낼 줄 아는 creator 능력
High Touch - 사람들과 소통하며 공감을 이끌어낼 줄 아는 empathizer 능력
그의 선언에서 볼 수 있듯이, 다가오는 시대의 핵심 화두는 인간 가치의 회복이라 할 수 있다. 기술적인 면을 보았을 때, 아이폰으로 대표되는 모바일 기술은 분명히 과거 PC와는 그 철학적 궤가 다르다. 웹 서버, 인터넷이 근본적으로 문서 처리를 위해 탄생한 기술이라면 모바일 기기의 핵심가치는 사람과 사람 간 소통, 그리고 행복이 될 것이다. 따라서 고도화한 기술 수준을 바탕으로 고객에게 행복한 감정을 전달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 미래를 대비하는 기업의 필수 생존 전략이 될 것이다.
융합형 인재를 위한 조건
15세기 경, 유럽의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콘스탄티노플을 비롯한 인근 지역의 사람들이 대거 서쪽으로 이주했다. 이 때, 플로랑스 지방의 명망 높던 가문인 메디치(Medici) 가에서도 많은 사람을 수용했는데, 여기에는 음악, 철학, 미술 등 다방면의 전문가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한 자리에 모인 이들은 틈틈이 자신들의 생각과 지식을 공유하며 전과 달리 다양한 공동작업을 하는데, 이렇듯 자연스레 허물어진 벽은 전에 경험하지 못 한 새로운 창조물을 쏟아내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고, 이는 곧 르네상스의 중요한 단초가 되었다. 이처럼 다양한 영역, 분야, 문화 등이 하나로 만나는 교차점에서 기존 생각을 새롭게 재결합함으로써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현상을 '메디치 효과(Medici Effect)'라 부른다.
현 시대가 요구하는 융합형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서는 각기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 경계의 벽을 허물고, 그들이 지닌 문화와 지식을 나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를 달성하기란 쉽지 않다. 소위 전문가 중에는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에 취해 고착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더러 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배타적이고 방어적 태도를 보이는 경향이 짙다. 따라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열린 마음뿐만 아니라 중재자의 역할이 중요하고 기업에서는 이를 지원해줄 수 있는 제도나 조직이 필요하다.
한편, 이처럼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모인 환경에서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협동하여 성공적으로 미션을 달성할 수 있을까? 이와 관련하여 '마시멜로우 도전(Marshmallow Challenge)'이라는 재미난 실험이 있어 소개한다.
'마시멜로우 도전'이란 4명이 한 팀을 이루어 18분 동안 스파게티와 테이프, 실, 마시멜로우를 가지고 가장 높은 탑을 쌓아 올리는 팀이 승리를 하는 간단한 게임이다. 이 때, 마시멜로우는 탑의 가장 꼭대기에 있어야 한다.
이 게임에는 학생, 디자이너, 건축가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참가하였다. 실험을 진행한 오토데스크 사의 톰 워젝은 이 게임을 통해 사람들이 팀을 이루어 협동하는 방식의 차이가 일의 성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았다.
결과는 참 흥미로웠다. 가장 실패를 많이 한 그룹은 경영대학원을 막 졸업한 MBA 학생들이었다. 뛰어난 수재들이 모인 이들 집단이 실패를 거듭한 이유가 재미있다. 무엇보다 이들은 팀 내 주도권 다툼과 같은 게임 외적인 요소에 시간을 소모하는 경향이 많았다. 또한 처음부터 완벽한 계획을 짜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막상 결과가 실패로 드러났을 때는 그대로 무너지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유치원생으로 이루어진 팀은 가장 높은 성과를 거둔 그룹에 포함되었다. 이들이 성공을 거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가장 두드러진 요인을 들자면 바로 “재귀적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기보단 최대한 빨리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시도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 피드백을 토대로 곧바로 좀더 개선된 구조물을 만들어 다시 도전했다. 즉, 반복적 실패를 통한 경험과 학습이 성공의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최근 많은 IT 기업이 도입하는 애자일 방법론과도 일맥 상통하는 점이 있어 많은 시사점을 준다.
"우리는 늘 기술과 인문학의 교차점을 찾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기술적 진보에 열광하던 대중은 언제부턴가 기계중심적 현대 문명에 조금씩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웰빙 열풍, 그린IT의 부상 등 최근 나타난 일련의 현상은 바로 이러한 변화의 양상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시기에, 그 자체로 가장 인간적인 학문이라 할 인문학이 각광을 받기 시작한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이제 기술의 우수성만으로 성공을 담보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다가오는 시대에는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바탕으로 대중의 공감을 이끌어내고, 가슴을 울릴 수 있는 상품만이 뛰어난 가치를 인정받게 될 것이다. 새로운 미래는 바로 지금 우리 눈 앞에 펼쳐져 있다. Ah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