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맞이하는 방법 : 삶의 성찰

문화산책/에세이 2018. 5. 30. 01:03


  몇 년 전, 자신의 죽음을 미리 체험해보는 이른바 죽음 체험이 성행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는 기술의 발전과 함께 VR과 결합하게 되어, 가상현실을 이용한 죽음체험 프로그램까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죽음은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섭리인 만큼, 과거에도 현재에도 사람들의 관심사 중의 하나입니다. 사람들은 왜 자신의 죽음을 체험해 보고 싶어 할까요? 죽음에 대한 원초적인 궁금증 때문일까요? 물론 그런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싶기 때문일 것입니다.

  삶을 되돌아보고자 하는 욕망은 과거의 사람 역시 가지고 있었습니다. 조선의 문인들은 어떤 방식으로 삶을 회고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자전(自傳)’입니다.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 자전(自傳)’의 전통은 한나라 사마천이 사기<자서(自序)>를 적으면서 자기 인생을 개괄하는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은 사람의 일생을 다루는 글쓰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한 편의 완성된 글에 인물의 의미있는 삶을 그려내는 것입니다.

  조선의 백탑시파인 박제가(朴齊家)의 자전인 <소전(小傳)> 일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조선이 개국한 지 384, 압록강에서 동쪽으로 1천여 리 떨어진 곳이 그가 태어난 곳이다. 신라의 옛 땅 출신으로 밀양을 관향으로 하는 집안이 그가 태어난 가계다.

  (출처 : 나는 어떤 사람인가 선인들의 자서전-. 이가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010-04-00. 심경호)

  현대의 자서전의 보편 양식인 1인칭으로 자신을 지칭하는 것과 달리, 자신을 3인칭 라고 표현하며 객관적인 대상으로 놓고 전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현대에 와서 생겨난 죽음 체험과 같은 프로그램은 직접 관 속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죽음이 눈앞에 닥친상황을 직접적으로 겪게 되는 것이므로 자신의 삶을 객관적으로 돌아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인들이 택한 방법인 스스로를 객관화하여 어떠한 생을 살아왔는지를 글로 적어내려가는 것은 스스로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질 수 있으므로 삶을 회고하기에 더욱 적절합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일기랑 자전이랑 무엇이 다른가?”

  자전은 일기와는 다릅니다. 일기는 자신만이 보기 때문에 내면의 깊숙한 곳까지 살피고 곱씹는 내용을 쓰는 반면, 자전은 내면의 깊은 곳을 성찰하고 쓰는 것은 맞으나 모든 이가 읽을 수 있으므로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게 되는 글쓰기입니다. 이는 현대의 SNS와 비슷하다고 생각됩니다. 각자가 본인의 일상을 기록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는 곳인 만큼 허구가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서양과 동양을 비교해보겠습니다. 서구의 자서전과 한자문화권 자전은 어떻게, 무엇이 다를까요?

  서양과 한자문화권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를 먼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서양의 경우, 기독교를 근간으로 하여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 내가 어떤 심판을 받을 것인가에 대해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서양의 자서전은 반성과 고백적인 성격이 강합니다. 그러나 한자문화권에서는 죽음을 자연의 섭리로 보았기 때문에 두려워하기 보다는 사는 동안의 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추구하는 인간상을 입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의미있는 삶에 대해 논한다는 의미입니다.

  선인들은 이처럼 글쓰기를 통해서 스스로의 삶을 고백하고 자신의 인성을 성찰했습니다. 여러분도 오늘은 따뜻한 커피 한 잔과 부드러운 조명 아래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건 어떨까요? 분명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방향을 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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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성의 전당 2018.08.12 18:32 신고  Address |  Modify / Delete |  Reply

    안녕하세요.
    저는 지성의 전당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죽음에 대해 관심 있어 하시는 것 같아 댓글을 남겨 보았습니다.

    '불멸의 자각' 책을 추천해 드리려고 합니다.
    인문학 도서인데, 한번 검토 부탁드립니다.
    '나는 누구인가?'와 죽음에 대한 책 중에서 가장 잘 나와 있습니다.
    아래는 책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

    인식할 수가 있는 ‘태어난 존재’에 대한 구성요소에는, 물질 육체와 그 육체를 생동감 있게 유지시키는 생명력과 이를 도구화해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의식과 정신으로 나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태어난 존재’ 즉 물질 육체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역할을 다한 도구처럼 분해되고 소멸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육체를 유지시키던 생명력은 마치 외부 대기에 섞이듯이 근본 생명에 합일 과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와의 동일시와 비동일시 사이의 연결고리인 ‘의식’ 또한 소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보충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총체적 단절작용을 ‘죽음’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존재의 일부로서, 물질적인 부분은 결단코 동일한 육체로 환생할 수가 없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의식’ 또한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모든 물질을 이루는 근간이자 전제조건으로서, 물질로서의 근본적 정체성, 즉 나타나고 사라짐의 작용에 의한 영향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타날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으며,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불멸성으로서, 모든 환생의 영역 너머에 있으므로 어떠한 환생의 영향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에 대한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자 실체로서, ‘있는 그대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체에 의한 작용과정으로써 모든 창조와 소멸이 일어나는데,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는다는 것입니까?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을 하고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윤회를 합니까?

    정신은 물질을 이루는 근간으로서의 의식조차 너머의 ‘본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윤회의 영역 내에 있는 원인과 결과, 카르마, 운명이라는 개념 즉 모든 작용을 ‘본체’로부터 발현되고 비추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태어난 ‘한 사람’, 즉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진 ‘지금의 나’로 여기며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한 사람’은 스스로 자율의지를 갖고서,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한다고 믿고 있지만 태어나고 늙어지고 병들어지고 고통 받고 죽어지는, 모든 일련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스스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책임을 외면하기 위해 카르마라는 거짓된 원인과 결과를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 거짓된 환생을 받아들이며, 이 과정에서 도출되는 거짓된 속박, 즉 번뇌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환영 속의 해탈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거짓된 자기견해 속의 환생과 윤회는, 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려면 반드시 비교 대상이 남아 있어야 하며, 대상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자율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는 꿈속의 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뚜렷하고 명백하다 할지라도 ‘나뉨과 분리’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나’에 대한 그릇되고 거짓된 견해만을 바로잡았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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