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2월12일부터 올해 4월14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미국 뉴욕현대미술관과 현대카드가 공동으로 주최한 ‘팀 버튼(Tim Burton)’ 전시가 열린다. 사람 많기로 소문난 팀 버튼 전은 이름이 무색하지 않게 평일에도 사람들로 북적였다. 전시장 안으로 길게 늘어서 있는 줄만 봐서는 사람에 치이는 명동 거리를 연상케 할 정도로 여느 전시장과는 달랐다. 한 곳에 계속 머무르는 사람들, 그리고 그 뒤에서 옆 사람과 담소를 나누며 기다리는 사람들. ‘도대체 어떤 작품이기에 사람들이 이렇게 한 작품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나’ 하는 기자의 생각은 작품 앞에 선 순간 사라진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거리 없다고 하던 옛 속담이 틀린 말이 되었다. 팀 버튼의 작품 하나하나는 자세히 보고 싶고 느끼고 싶고 생각하고 싶은 매력 있는 작품이었다.
조금은 낡아 보이는 간판, 녹이 슨 채 구부러져 있는 철장 등 팀 버튼 특유의 분위기로 한껏 치장한 서울시립미술관 입구를 지나 서소문본관에 도착하면, 팀 버튼의 대표작인 <크리스마스의 악몽>의 한 장면이 사람들을 맞이한다.
왼편에 위치해 있는 매표소에서 표를 끊은 뒤 서소문본관을 들어서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설치되어 있는 팀 버튼 전 입구가 보인다. 그 오른편으로는 팀 버튼을 소개하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현대카드 컬처프로젝트> 중 아홉 번째인 팀 버튼 전은 본래 파리에서 마지막으로 순회공연을 마치기로 했다. 그러나 남다른 실험정신과 독창성으로 이 시대의 새로운 흐름을 이끄는 문화 아이콘을 소개하고자 하는 현대카드의 설득 끝에 아시아 최초로 서울에서 전시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2009년 팀 버튼의 초기 습작부터 최근의 영화 캐릭터까지 660점이 넘는 작품을 전시해 팀 버튼을 재 조망했던 뉴욕현대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 컬처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현대카드가 함께 마련한 이번 전시에서는 약 860여점의 팀 버튼 작품을 볼 수 있다.
2층 높이까지 닿아있는 커다란 보라색 전구에 그려진 눈과 눈을 마주치며 입구에서 티켓을 내고 2층 계단을 올라간다. 올라가는 계단은 빨간색의 둥근 선이 마치 먹이를 옥죄는 뱀처럼 계단을 빙글빙글 둘러싸고 있는데, 계단 끝에 다다르니 빨간색 선이 다름 아닌 기괴하게 입을 벌리고 관객들을 기다리는 괴물의 혀임을 알게 된다.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벌린 괴물의 입 속으로 들어가면, 그 때부터 팀 버튼의 세계가 시작된다.
팀 버튼 전은 크게 3시기로 구분되어 있다. 팀 버튼이 지금의 색깔을 갖추기까지의 배경이 되는 ‘버뱅크 시기’와 캘리포니아 인스티튜트 오브아트와 디즈니에서 근무한 시기인 ‘성숙기’, 그리고 의상디자인, 캐릭터 등에서 ‘팀 버튼 사단’이라는 전문 협업 팀을 만들어 내며 세계적인 영화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는 지금의 ‘전성기’이다. 각 전시장에는 팀 버튼의 그림 뿐 아니라 영화 소품이나 팀 버튼이 영화화한 작품을 짤막하게 보여주는 영상, 그리고 작품에 나온 음악까지도 전시되어 있다.
유년시절, 팀 버튼은 프랑켄슈타인, 드라큘라와 같은 괴물영화에 심취했고 공동묘지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내성적이었지만 유별난 상상력을 가진 팀 버튼은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 보고 경험한 것을 곧잘 그만의 스타일로 스케치하곤 했다고 한다. 낱장으로 찢은 공책은 물론이고, 작은 수첩이나 신문, 심지어 냅킨까지 펜이 지나갈 수 있는 것이면 어디에나 팀 버튼은 그의 상상력을 펼쳐 놓았다. 때로는 화려한 색채로 종이를 물들이기도 했지만, 보통 가느라단 선으로 무심한 듯한 터치로, 그렇지만 세심하게 표현한 그림이 대부분이다.
팀 버튼 그림의 특징이라면, 장난감, 괴물, 새로운 생명체, 공상과학, 기존에 있던 주류 이미지를 비틀어 표현한 이미지 등을 주제로 다룬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괴한 상상력과 어린아이 같은 감성을 바탕으로 디즈니 영화사에서 그만의 독창적이고 유머 있는 스타일을 만들어 내었다. 팀 버튼의 눈에는 모든 사물이 눈을 달고 있는 것처럼 보일까? 또는 팀 버튼이 보기에 어떤 사물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는 것과는 다르게 보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팀 버튼은 사물 뿐 아니라 여러 생명체에도 그의 색깔을 입혀 놓았다. 때로는 여러 개의 생명체를 섞어 놓기도 하고, 때로는 사물의 한 부분만 부각하기도 하면서……. 앞으로 나아갈수록 팀 버튼이 창조해낸 기괴한 세계에 점차 빠져들게 된다.
자신만의 스타일이 구축된 이후, 팀 버튼은 세계적인 영화감독이자 아티스트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그 동안 그가 스케치하며 구상해왔던 캐릭터와 스토리들이 영화로 매력 있게 구현되어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이다. <가위손>, <배트맨>, <크리스마스의 악몽>, <유령신부>, <찰리와 초콜릿 공장>,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같은 대표적인 작품들이 탄생되고 완성되는 과정을 돌아보며 팀 버튼의 상상력과 독창성에 절로 감탄하게 된다. 영화감독일 뿐 아니라 제작자, 예술가, 사진가, 작가, 콜렉터로서의 팀 버튼을 보며, 어렸을 적 만화영화에 열광하고 새로운 시선으로 이것저것을 그려내던, 나만의 세계를 상상했던 스스로의 모습이 머릿속 깊은 곳에서 조용히 떠오르는 듯 했다.
전시장을 둘러보다보면 벽면에 이런 글귀가 쓰여 있다.
소신이 있다면 싸울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 남의 꿈을 만드는 데에만 인생을 낭비하십니까?
- 오손 웰즈, 에드우드 中 -
앨리스: 내 머리가 이상해져버린 걸까요?
아버지: 그런 것 같구나. 너는 비정상이야. 확실히 좀 이상해. 하지만 비밀인데, 멋진 사람들은 다 그렇단다.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中 -
팀 버튼을, 팀 버튼의 작품 세계를 이 두 글귀만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될 정도로 적절한 글귀였다. 팀 버튼이 사회가 정해준 틀에, 남들이 말하는 기준에 맞춰 살았다면 지금과 같은 새롭고 독특한 영화들로 즐거움을 줄 수 있었을까? 그런 의문이 듦과 동시에 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나는 지금, 내가 꿈꿔왔던 세계를 무너뜨리고 이미 만들어진 남의 세계에 편승해가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가? 취업이 힘든 요즘 같은 시대에,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라는 메시지는 언뜻 보면 위험하고 불안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들과 똑같이 무비판적으로 기계처럼 사는 것이 옳은 것인지 또한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
팀 버튼 전에서 얻고 돌아온 것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재미만은 아니었다. 상상력과 창조성이 만들어 낸, 한 사람의 독자적인 세계에 대한 감동을 조금이나마 같이 느꼈길 바라며. 지금부터라도 엉뚱한 생각들 표현한 습작, 조금 이상할 수도 있는 우리만의 세계를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 Ahn
대학생기자 김가윤 /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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