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고찰하는 두 가지 관점, 후설과 하이데거

문화산책/서평 2013.01.26 07:00

우리는 동일한 대상을 보고도 서로 다른 인상을 갖게 되거나, 상이한 해석을 하게 된다. 산책을 하다 발견한 꽃 한 송이는 생물학자에게는 분석대상으로 보이고, 미술가에게는 화폭에 담을 예술적 대상이며, 어떤 이에게는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소재가 될 수 있다이렇듯 우리가 가지는 사고체제에 따라 동일한 대상은 서로 다른 의미의 존재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상이한 해석과는 다른 불변의 객관적인 무엇은 존재할까? 해석의 대상이 되는 어떤 실체가 객관적으로 존재할까? 이처럼 분변의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고대시대부터의 철학자의 과제이자 숙명이었다. 과학문명이 빠르게 발전하고 실용성과 효율성이 중요시되는 지금 이 시대에 이러한 고리타분하고 대답이 없는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은 비생산적인 일처럼 치부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시대일수록 인간됨에 대한 질문 던지기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노력은 우리에게 물질적인 혜택을 줄 순 없을지라도, 인간됨에 대한 고민을 통해 삶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다음 책>

 

후설과 하이데거도 진리추구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던진 대표적인 철학자이다. 이 두 학자는 의식, 현상, 존재 등의 개념을 사용하면서 세계의 본질을 탐구하는데 그 방법론에서 상이한 입장을 취한다

우선 후설은 하나의 대상이 각 관점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인식되는 의미 현상을 탐구하는 방법으로 현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해내는 기술과 대상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려 그 본질을 파악하게 하는 환원을 택한다. 이와 함께 판단 중지를 통해 우리가 취하는 판단을 현실적인 제약에서 탈피해야 함을 주장한다. 인식하는 주관과 인식되는 대상 모두를 순수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이른바 제3의 메타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하이데거는 존재하는 대상인 존재자와 있음인 존재라는 개념에 중점을 두어 세계--존재라는 맥락 속에서 인간의 실존적 성격을 강조한다. 인간은 지극히 현실적인 존재로서 세계 안에서만 사고할 수 밖에 없는 역사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후설과 하이데거가 상이한 철학적 방법을 취한 것은 각자가 추구한 목표가 다르기 때문이다. 후설은 과학지상주의가 풍미하는 시기에 철학의 위상하락을 막고자 했다. 철학이 보편적인 이상이나 도덕적 사명의 임무를 가져야 한다는 신념 아래 판단중지와 같은 방법을 통해 절대적 진리에 도달 가능한 철학을 추구한 것이다. 반면 하이데거는 완벽한 이성의 역할을 추구하기보다는 존재라는 개념에 초점을 맞추어 세계 안에서의 인간의 의미를 발견하고자 한 것이다

이 둘의 업적은 누가 옳고 누구는 그르다는 이분법적인 잣대로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각자가 추구한 목적의식이 다르고 이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론이 상이했을 뿐, 인간성과 삶에 대해 탐구하고자 했던 노력은 우열을 가르기 힘들다

확실한 것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고 실천한 점은 사유의 경건함을 위해 물음의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쁜 현대사회 속에서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은 치열하나 여유로운 여정을 통해 삶의 의미를 고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Ahn


기고. 방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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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팍팍할수록 결국 인문이 밥 먹여준다

문화산책/서평 2013.01.08 07:00

살기 어려울수록 사람은 본능에 따라 살게 된다. 당장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추구하고, 직접 도움이 되는 것을 유용하다고 여기며, 간접적 혹은 우회적으로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어줄 것들에 회의하게 되는 것이다.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의 파산으로 유럽에도 닥친 금융위기 이후 비교적 "아낌없이" 투자되어왔던 오스트리아 국영방송의 음악부서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한 편곡자의 수입이 그 전 해 대비 무려 10분의 1로 떨어지는가 하면 방송 확정 상태에서 아예 제작 자체가 취소된 프로그램도 있었고, 지금까지 쌓아온 레퍼토리로 대부분의 방송을 대체해야 했다.

이러한 현상은 예술 분야뿐만 아니라 인문 분야에도 자주 나타난다. 시대가 어려울수록 철학이나 미학, 문학 등에 집중하는 사람들이 "이상하거나 우스워" 보이기도 한다. 당장 내일 먹을 것이 없고 집이 없는데도 인간의 존재를 고민한다든가, 가족을 부양하기도 벅찬데 예술에 대한 연구와 비판 그리고 미학적 고찰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차라리 그 시간에 어디가서 몸을 써서라도 돈을 벌어오지!" 라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극단적인 비유일 뿐이고 현실에서는 상당히 복합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대에는 그야말로 순수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에 대한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하지만 이런 전반적인 인식을 강력하게 비판하며 "어려운 세대일수록 인문이 필요하다"고 성토하는 책이 있다. "살아가면서 인문이 왜 필요한데?" 혹은 "인문이 밥 먹여주냐?" 라고 누군가가 물어오면 분명 그 일차원적인 사고의 맹점을 지적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어떻게 시작할지 몰랐던 이에게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줄 책, 제목에서부터 저자의 "내공"이 느껴지는 박민영 씨의 "인문 내공"이다. 

 


<출처: 다음 책>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인문이다

"모두가 비슷하게 생각할 때, 아무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월터 리프먼의 짧은 한 문장은 강력한 메시지이다. 주체적인 자아이기를 포기한 현대인의 자화상을 꼬집은 그의 한 마디는 인간 고유의 능력인 "사유"의 위기를 말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동물과 인간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바로 사유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이 사유하기를 멈춘다면 그 때는 어떻게 될까? 사유로 정의되어왔던 인간이 사유를 귀찮아하거나 사유하는 능력을 상실한 시대, 바로 인문 고갈의 시대가 아닐까 한다.

전문지식을 배우며 기술을 익혀 경쟁력을 기르기도 바쁜 현대인에게 갑자기 인문 능력을 계발하라는 것은 "배부른 소리"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아직 배가 덜 고프고 절실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사치스러운 말을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인문 내공"은 바로 이 부분에서 시작한다. 미국의 언론인이자 사회비평가인 얼 쇼리스로부터 시작된 노숙자 인문학 과정이 우리나라에서도 진행된다. 물론 아직까지는 그 규모와 횟수가 많이 아쉬운 실정이지만 꾸준히 뜻을 이어가려는 노력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박수를 보내고 싶은 일이다. 저자는 당장 경제적 지원이 급한 노숙자에게 인문학을 가르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비판에 경희대 철학과 우기동 교수를 인용한다.

"인문학은 삶의 조건 가운데 가장 본질적인, 인간의 품격과 관련된 것이에요. 한 사람이 가난하다고 해서 인문학을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를 '비인간'으로 대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p.18)

우기동 교수의 답변은 인문학 본질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차별부터가 큰 문제임을 지적한다. 인문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인문으로써 얻어질 수 있는 삶의 가치를 외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노숙자처럼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인문 결핍 현상을 겪는 모두에게 닥친 위험이다. 스스로가 내면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것을 개발해나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 하기 때문에 결국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인의 의지 혹은 타인의 필요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꼭두각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인문적 사유 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생활의 압력, 자기 집단의 논리,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굴복하게 된다." (p.24-25)

우리 사회는 지식인을 갈망한다

"묻지마" 범죄는 물론 가족 혹은 친구 간의 살인, 강간 등 신문에 대서특필될 만한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분노"에 가득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소한 시비가 살인으로 이루어지는가 하면, 가장 안전해야 할 가정 안에서도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에는 분명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한 사회학자는 이런 분석을 내놓았다.

"대한민국이 분노에 가득차 하나의 시한폭탄처럼 위험해진 것은, 공공연히 발생하는 부정하고 불공평한 사회적 이슈에 대한 결과다."

정치인, 기업인의 비리와 수많은 사기 사건. 연예인이 누리는 특혜나 불공평한 처사 등은 사람을 분노케할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무기력하고 우울하게 만들고, 이 부정적인 감정들은 결국 극적인 행동으로 표출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불의가 처벌받지 않고 옳고 그름의 기준이 아닌 권력의 유무 기준으로 돌아가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그 소용돌이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지 못하는 세대는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다. 체제에 순응하여 자신의 "운명"이라 생각하고 체념하는가, 극한 상황으로 몰고가 분노를 마음껏 발산하는가의 문제라는 것이다.

하다못해 페이스북 타임라인만 조금 훑어보아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현 정권을 비판하고 사회 곳곳에 숨어있는 부조리에 분노하는지 알 수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마치 사회운동가 혹은 젊은 혁명가 같은 발언을 쏟아내지만 정작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움직임은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실제적인 방법을 찾지 못 하고 불특정다수에게 호소하는 외로운 메아리가 울릴 뿐이다.

저자는 현실을 바꿀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은 오직 "국민이 똑똑해지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것이 현대 사회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라는 것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접수될 만한 사회적 변화가 있고, 엘리트들이 새로운 지적 대안들을 제출한다 하더라도, 대중이 그를 판단하고 지지해주지 않으면 건설적인 미래는 있을 수 없다. 그 대안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것, 그것은 대중의 인문적 사유 능력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판단이 역사의 길을 결정한다." (p.314)

누군가가 명쾌한 해답을 제시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명쾌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그 문제와 해답을 모두 이해하는 사람들뿐이다. 즉, 지금의 상황이 한심하고 대책없다고 비판하고 싸울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인문적 사유 능력을 기르고 스스로가 자신을 더욱 개발하여 국민이 현명해져야 비로소 사회가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의 제안은 다소 이상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그가 제시하는 길이 조금 돌아가더라도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있음은 분명하다. 우리 사회는 지금 깊은 통찰력과 사유 능력을 가진 지식인을 갈망하고 있다.

"집단은 그냥 존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집단의 논리'를 개발한다. 집단의 논리는 집단에게 이익이 되는 논리다. 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집단 전체에게 골고루 이익을 주지 않는다. 집단 논리의 가장 큰 수혜자는 대개 지도층이다. 그들의 이익이 집단 전체의 이익으로 포장되는 경우가 많다. 나아가 집단은 논리는 보다 고차원적인 도덕적 규범으로 포장된다. 예를 들어, 국가의 이익은 애국의 이름으로, 종교 집단의 이익은 순교의 이름으로, 사회의 이익은 정의의 이름으로 포장된다." (p.104)

"의식적인 존재인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합리성을 부여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그런 까닭에 어떤 사회 환경에 적응하면 그 환경을 합리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어떤 사회나 집단에 ‘적응’한다는 것은, 그 질서, 논리, 체제, 문화 등을 내면화한다는 것을 말한다. 환경이 불합리하더라도 그것을 내면화하는 데 성공하면 비판적 의식이 줄어든다." (p.132)

진심으로 불의한 사회를 걱정하고 그것이 나아지길 바란다면, 지금 우리가 해야할 일은 단순한 현상이나 표면적 이슈들을 욕하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인 문제를 이해하고 그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는 인문 내공을 기르는 것이다.

인문적 사고로 경쟁력을 길러라

한 권의 책을 읽었는데 마치 몇십 권의 책을 읽은 것 같은 감동과 깊이를 체험하는 책들이 있다. 이런 책을 만나는 것은 독자로서 큰 기쁨이자 도전이기도 하다. "인문 내공"은 제목 그대로 오랜 세월 수많은 경험과 독서, 그리고 사유를 통한 저자의 "내공"을 여과없이 드러낸다.

총 세 부로 나뉘어져 평균 5~6쪽 정도 분량의 글들로 이루어져 있는 이 책은 쉽게 소개하고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광범위한 인문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 시대적 이슈부터 역사적 이슈까지, 독서의 방법에서부터 학문의 연구까지 넓은 분야를 섭렵하고 있음에도 글 하나 하나가 간결하고 불필요한 말 없이 핵심을 찌르고 있어 읽는 내내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수많은 테마를 통해 우리에게 여러 번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래도 스스로 사유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 하겠습니까?" 우리는 지구에 사는 60억 인구 가운데 한 사람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또 사회를 바꾸어나갈 수 있는 유일한 구성원이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무언가를 개선하고 바꾸길 원한다면 먼저 "내공"을 쌓아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전체적 틀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통찰할 수 있을 때 정치인은 함부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비리를 저지르지 못 할 것이다. 기업이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국민을 우롱하거나 이용하지 못 할 것이다. 공허한 불평과 대상 없는 비판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 한다. 진정으로 사회를 바꾸고 싶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나아지고자 하는 노력이 분명히 필요하다.

"의식의 양도는 정치적 권리의 양도보다 위험하다. 주체 의식의 위기에 처한 현대인들은 '세계 또는 인류가 왜 이런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하는 적극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으며, 유능한 대중 조작 전문가가 조종하는 기술 체제 속에서 장기판의 졸처럼 움직이고 있다. 지배적인 규칙과 체제에 무조건 순응하는 '창조적 자의식의 상실'. 그것은 미래의 재앙을 무한 확대할 수 있는 위험한 조짐이다." (p.314) Ahn

 

 대학생기자 허건 / 고려대 행정학, 경영학

 

"사람을 좋아하고, 도전을 즐기는 감동적인 삶을 사는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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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의 이성-비이성 경계 허물기의 매력

문화산책/서평 2012.09.12 07:00

데카르트에서 들뢰즈까지 근대 철학의 경계들을 낱낱이 파헤치는 『철학과 굴뚝청소부』를 읽고 철학사를 압축적으로 그려보는 글을 쓰자는 애초의 목표는 책을 완독한 뒤에 의구심으로 남았다. 중세철학에 대한 반역으로 등장한 근대철학의 탄생과 성숙, 그리고 동요와 위기를 제한된 분량에 모두 담고자 하는 시도는 자칫 당대의 주요한 철학자의 이론을 단지 몇몇의 핵심단어로만 제한하여 설명하는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책 전체에 대한 표면적인 소개보다는 기억에 남는 철학자를 소개하는 것이 더 의미 있어 보이는 이유이다. 책에 언급된 여러 명의 철학자 중에서도 푸코를 선정한 이유는 경계 허물기를 제시하는 그의 사상이 다른 사상가들에 비해 유독 ‘특이하게’ 다가온다는 주관적인 판단 때문이다. 


<출처: 다음 책>

이 책에서 제시한 기준에 따르면 푸코의 사상은 크게 세 시기로 구분된다. 첫째는 ‘고고학’의 시기이다. 푸코의 고고학은 진리, 과학이라고 명명되는 주류적인 지식에 의해 가려진 비주류들을 들추어 내는 작업을 의미한다. 주류에 의해 감추어진 것들을 침묵하는 소리라고 칭한 본 책의 저자는 침묵하는 소리의 흔적이 남아 있는 문학이나 미술 등 다양한 문화적 유물을 통해 과학이나 역사책에 나오지 않는 잊혀진 과거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고고학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풀이한다. 

둘째는 ‘계보학’이라는 시기이다. 여기서 말하는 계보학이란 사회의 모든 것들에 깃든 가치와 권력의지를 드러내고 그 권력의 효과를 분석하는 작업이다. 셋째는 권력과 자아의 관계를 규정하는 시기로서 권력을 통해 자아가 구성되는 메커니즘을 연구하는 시기이다(여기서 말하는 권력이란 어떠한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힘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단어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각각의 시기에 푸코가 이룬 사상적 성과는 모두 고유한 의미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 남은 것은 첫째 시기인 고고학에서 제시하는 ‘침묵의 외침’이다. 저자에 의하면 이는 정상과 비정상, 동일자와 타자, 내부와 외부 사이에 만들어진 경계를 허무는 작업이다. 이성의 능력을 숭상하는 근대시기를 거치면서 인류는 과학혁명을 비롯한 수많은 업적의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소위 과학이라는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영역에 과도하게 의존한 결과, 사람들은 과학/비(非)과학, 이성/비이성, 정상/비정상 등의 이분법적인 사고체계에 갇혀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는 것과 거부돼야 하는 것으로 나누는 근시안적인 시각을 습득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고는 과학영역뿐만 아니라 사회영역에도 적용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주류와 비주류를 의식적으로 나누며 비주류에 속한 타인을 배제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실수를 범하게 한다. 

푸코는 소위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환상에 깨어날 것을 강조하면서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경계의 허위성을 고발한다. 이렇게 해야지만 그 동안 소외되었던 타자의 목소리, 그 동안 침묵할 수 밖에 없었던 타인의 억압된 외침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푸코의 사상이 단지 ‘자신과 타인 간의 차이를 받아들이자,’ ‘차별은 부당하다’ 등의 도덕적인 당위성을 되풀이한 것이라면 그의 업적이 유독 ‘특이하게’ 다가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사상이 매력적인 것은 비이성, 비주류 등을 수용하자는 의미를 전달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차이를 생성하는 경계를 적극적으로 파괴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즉, 푸코는 이성/비이성을 나누는 경계 위해서 비이성을 수용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성과 비이성이라고 가르는 기준 자체를 없애고자 한다. 

나와 다른 타인을 인정하는 것조차도 어려운 일인데, 그 차이를 없애자고 하는 것은 너무 과격한 요청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차이가 차별로 변질되는 것을 막고, 차이를 인정/존중하는 자세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차이라는 경계를 지우고자 하는 푸코의 사상에서 우리는 충분히 성찰할 만한 가치가 있는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더욱이 타인과 자신을 구별하고자 하는 이분법적인 사고가 견고한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경계 허물기’에 대한 의지와 실천의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Ahn

 

사내기자 방지희 / 안랩 세일즈마케팅팀

지금 20대의 청춘을 사람들과의 소중한 만남으로 채우고 싶습니다. 
글을 통해 타인의 마음을 읽고, 글을 통해 타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자가 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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