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동일한 대상을 보고도 서로 다른 인상을 갖게 되거나, 상이한 해석을 하게 된다. 산책을 하다 발견한 꽃 한 송이는 생물학자에게는 분석대상으로 보이고, 미술가에게는 화폭에 담을 예술적 대상이며, 어떤 이에게는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소재가 될 수 있다. 이렇듯 우리가 가지는 사고체제에 따라 동일한 대상은 서로 다른 의미의 존재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상이한 해석과는 다른 불변의 객관적인 무엇은 존재할까? 해석의 대상이 되는 어떤 실체가 객관적으로 존재할까? 이처럼 분변의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고대시대부터의 철학자의 과제이자 숙명이었다. 과학문명이 빠르게 발전하고 실용성과 효율성이 중요시되는 지금 이 시대에 이러한 고리타분하고 대답이 없는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은 비생산적인 일처럼 치부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시대일수록 인간됨에 대한 질문 던지기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노력은 우리에게 물질적인 혜택을 줄 순 없을지라도, 인간됨에 대한 고민을 통해 삶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다음 책>
우선 후설은 하나의 대상이 각 관점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인식되는 “의미 현상”을 탐구하는 방법으로 현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해내는 ‘기술’과 대상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려 그 본질을 파악하게 하는 ‘환원’을 택한다. 이와 함께 ‘판단 중지’를 통해 우리가 취하는 판단을 현실적인 제약에서 탈피해야 함을 주장한다. 인식하는 주관과 인식되는 대상 모두를 순수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이른바 제3의 메타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하이데거는 존재하는 대상인 존재자와 있음인 존재라는 개념에 중점을 두어 세계-나-존재라는 맥락 속에서 인간의 실존적 성격을 강조한다. 인간은 지극히 현실적인 존재로서 세계 안에서만 사고할 수 밖에 없는 역사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후설과 하이데거가 상이한 철학적 방법을 취한 것은 각자가 추구한 목표가 다르기 때문이다. 후설은 과학지상주의가 풍미하는 시기에 철학의 위상하락을 막고자 했다. 철학이 보편적인 이상이나 도덕적 사명의 임무를 가져야 한다는 신념 아래 ‘판단중지’와 같은 방법을 통해 절대적 진리에 도달 가능한 철학을 추구한 것이다. 반면 하이데거는 완벽한 이성의 역할을 추구하기보다는 ‘존재’라는 개념에 초점을 맞추어 세계 안에서의 인간의 의미를 발견하고자 한 것이다.
이 둘의 업적은 누가 옳고 누구는 그르다는 이분법적인 잣대로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각자가 추구한 목적의식이 다르고 이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론이 상이했을 뿐, 인간성과 삶에 대해 탐구하고자 했던 노력은 우열을 가르기 힘들다.
확실한 것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고 실천한 점은 사유의 경건함을 위해 물음의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쁜 현대사회 속에서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은 치열하나 여유로운 여정을 통해 삶의 의미를 고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Ahn
기고. 방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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