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구글 이미지>
헤어질 때 “카톡해” 대신 “삐삐쳐”가 유행하던 시절
삐삐는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전성기를 누렸던 시대의 대표 아이콘이었다. 여기서 잠깐, 삐삐가 도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어린 독자들을 위해 삐삐가 무엇인지 먼저 간단히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기계의 호출 알림 소리에서 그 명칭이 유래된 삐삐의 사전적 정의는 ‘무선 호출을 통한 호출 서비스를 사용할 수 있는 휴대용 무선 통신 단말기기의 하나’이다. 오늘날의 휴대전화에서 모든 기능을 없애고 호출기능만을 달랑 남긴 것이 삐삐인 것이다. 호출을 거는 사람이 받는 사람의 삐삐에 자신을 식별할 수 있는 전화번호나 숫자 혹은 음성메시지를 남기면, 호출을 받은 사람이 상대방에게 전화를 거는 방식으로 연락이 이루어졌다.
삐삐는 국내에서 1983년 최초로 서비스를 시작하여 처음에는 기업의 사업용 통신수단으로만 이용되었던 것이 1997년에는 개인 가입자 수 1500만 명을 돌파하며 명실공히 사람들 사이의 대표 연락 수단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런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핑클, HOT, 심은하 등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연예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삐삐 광고에 출연하기도 했다.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러니까 지금의 30대, 40대에게 삐삐는 잊지 못할 추억을 많이 안겨준 일상적인 물건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공중전화 앞은 자신에게 호출을 남긴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이곤 했다. 카페에도 테이블마다 전화기가 비치되어있는 곳이 많았다. 또 숫자밖에 남길 수 없는 삐삐의 기능적인 한계로 인해 ‘8282’(빨리빨리), ‘1004’(천사), ‘1010235’(열렬히 사모)’처럼 갖가지 기발한 삐삐 용어들이 탄생하기도 했다.
삐삐의 근황
하지만 2000년대 이후로 휴대전화에 1인자 자리를 물려주게 되면서 삐삐는 병원이나 군대처럼 긴급 호출이 필요한 특수한 상황에서만 간간히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2009년까지만 해도 삐삐 사용자 수는 012리얼텔레콤 사용자 2만 5000명, 015서울이동통신 사용자 1만 8,000명 등 모두 4만 3,0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하지만 리얼텔레콤이 서비스를 중단하면서 현재는 겨우 1만 8000여명을 웃도는 수준이라고 한다.
삐삐의 기능은 진화를 거듭해서 이제 90년대 단방향 무선호출 서비스 삐삐는 사라지고, 서울이동통신의 양방향 서비스만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양방향 서비스는 메시지를 받을 수만 있는 단방향 서비스와는 달리 답장을 보내는 기능도 있다. 본래 전화번호 남기기와 음성사서함만 지원하던 것에서 문자 주고 받기와 위치기반 서비스가 추가된 것이다.
10여 년 동안 사양길을 걸어온 삐삐를 두고 정부와 이동통신업계 모두 고민이 많다. 정부는 비효율적으로 낭비되는 삐삐 번호를 회수하고 싶고, 서비스 회사는 큰 수익이 없는 삐삐 사업을 당장이라도 철수하고 싶다. 그래서 업체 측에서는 이제 더 이상 신규 가입자를 받지 않고 있지만, 전기통신법상 이미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의 번호를 임의로 뺏거나 서비스를 중단할 수 없게 되어 있어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이런 이유로 한 통신회사는 남아있는 삐삐 가입자 4명 때문에 사업을 접지 못하는 바람에 "삐삐를 해지하면 3천만 원을 주겠다"며 이용 해지를 권유했다는 해프닝도 있다. 비록 아직 일부 사용자들이 남아있다고는 해도, 삐삐가 사라져가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인 것 같다.
삐삐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이렇게 기억 속으로 사라져가는 삐삐를 추억하는 사람들이 모인 인터넷 동호회가 있다. 바로 ‘삐삐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http://cafe.daum.net/ilovebeeper)’이다. 회원수가 거의 4000여명에 달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삐삐 관련 커뮤니티이다. 카페의 첫 화면에서 “삐삐는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삐삐와 과거의 추억들을 소중히 간직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문구가 방문자들의 마음을 두드린다. 이 카페의 운영자 강동욱 씨와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먼저 본인과 카페에 대한 소개를 간단히 부탁드려요.
저는 다음 카페 ‘삐삐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운영자 강동욱입니다. 1976년생으로 부산에 살고 있고, 현재 부산외고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원래는 99년도에 개설된 ‘삐삐가 폰보다 좋아요’라는 카페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운영자님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활동이 어려워졌고 폰을 가지고 있으면서 삐삐를 사랑하는 분들이 카페 이름 때문에 가입이 어렵다는 의견도 있어서 2001년에 새로 개설한 카페가 삐사모입니다. 카페의 메인 화면을 보면 아시겠지만, 잊혀져 가는 것들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자는 취지에서 만든 공간이에요.
- 가지고 계시는 삐삐에 대해서도 간단히 소개해주세요.
제 삐삐는 96년도 4월에 구입한 것인데, 대학생 때 처음 과외비를 받은 돈으로 아주 큰 맘을 먹고 구입한 거랍니다. 지나고 보니 제 대학시절을 언제나 함께 했던 물건은 삐삐 밖에 없었던 것 같네요. 제 대학 시절 모든 추억을 이 삐삐와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에요.
<출처: 다음 카페 ‘삐삐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 아직까지도 정말 삐삐를 사용하고 계신가요?
사실 저는 2004년에 핸드폰을 구매했습니다. L사에 입사한 친구의 압력때문에요. (웃음) 사실 삐사모 회원 분들 거의 대부분이 삐삐와 핸드폰을 같이 쓰고 있습니다. 현재는 핸드폰만 쓰시는 분들이 절대다수고요. 처음 카페가 활성화되지 못했던 큰 이유가 삐삐와 핸드폰을 비교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해서 지금 카페의 정체성을 ‘핸드폰이 있어도 삐삐의 소중함을 잊지 않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정했답니다.
- 삐삐를 사랑하는 자신만의 이유가 있으신가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기다림이죠. 요즘에는 누구나 연락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바로 연락을 할 수 있잖아요. 하지만 삐삐를 쓰는 사람들은 공중 전화를 찾거나 누군가에게 부탁해서 핸드폰을 빌릴 때까지는 기다려야 합니다. 이 시간이 짧으면 몇 초, 길게는 몇 십 분이 될 수도 있지만 누군지 모를 번호에 대한 설렘과 궁금증을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었어요. 그런 이유로 우리들이 가끔씩 잊고 있는 여유를 삐삐가 찾아준다는 것을 느낍니다. 어느 날 갑자기 삐삐가 울렸는데 모르는 번호가 찍혔을 때의 그 설렘을 아시나요? 혹시 그녀가 아닐까, 혹시 그가 아닐까 하는 두근거림... 요즘처럼 발신자 번호가 찍혀서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금방 알려주는 핸드폰과는 다른 설렘이 있답니다. 헤어졌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음성을 남겼다고 떴을 때 그 불안함과 설렘,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를 거에요. 일단 삐삐 예찬은 여기까지만 하죠. (웃음)
- 삐삐의 가장 큰 단점이라면 무엇이 있을까요?
그건 물론 메시지를 확인하고 전화를 걸기 위해 공중전화를 찾아야 한다는 거에요. 시간이 갈수록 공중전화가 많이 없어져서 더욱 힘들었어요. 언젠가 친구를 만나러 밖에 나갔는데 친구가 메시지를 남기고 전 그 메시지를 확인하러 전화기를 찾고 하는 도중에 길이 엇갈려 한참을 헤맨 적이 있었죠. 그리고 공중전화비용도 만만치 않아서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삐삐가 핸드폰보다 비용이 더 많이 들었답니다.
- 마지막까지 혼자서 삐삐를 쓸 때 주위의 반응은 어땠나요?
특이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요. 어떻게 아직도 삐삐가 있냐고 신기해하거나, 그렇게 빈곤하냐고 타박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런 우직함이 좋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요. 마주보고는 할 수 없는 얘기를 삐삐에 음성메시지로 남길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사람들도 있었죠. 그런데 가끔씩 전화기를 찾다가 없어서 핸드폰을 빌리려고 하면 아주 싫어했답니다. (웃음) 그렇게 거의 혼자서만 삐삐를 쓰다가 한번은 오랜만에 만난 절친한 친구 역시 아직도 삐삐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 삐삐에 얽힌 추억에 대해 듣고 싶어요.
처음 삐삐를 샀던 날, 처음으로 삐삐에 메시지를 남긴 친구, 처음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남겨준 메시지 등 삐삐에 얽힌 여러 가지 추억들이 많죠. 아, 삐삐 치는 친구 중에 제가 미워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집에 계속 있을 거면서 자기 집 번호 대신 요금이 비싼 핸드폰 번호를 찍어주는 애가 있었어요. 핸드폰으로 걸었는데 집이라고 하면 제가 바로 끊어버렸어요. (웃음) 또 제 삐삐는 메시지를 3개까지 장기 보관 할 수 있었는데요, 모두 친구가 생일 때 보내준 축하 메시지였어요. 그런 기분 좋은 음성메시지들은 듣고 또 듣곤 했죠.
-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요즘 젊은이들이 유행을 쫓기에 바쁜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젊음이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찾는 시기니까요. 하지만 가끔씩은 사람들이 지난 것에 대해서 너무 쉽게 잊어버리고 사는 것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도 있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삐삐가 우리 곁에서 멀어진 게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닌데도 벌써 많은 사람들에게 까맣게 잊혀진 것 같네요. 비록 삐삐는 우리 곁에서 사라졌지만, 삐삐와 함께 했던 추억과 지나가버린 것들에 대한 소중함만은 마음속에 항상 간직했으면 좋겠어요.
현재 일반인을 위한 삐삐 서비스는 모두 막을 내린 상태이다. 더 이상 삐삐 신규 가입은 불가능하다는 카페의 공지 글 아래에는 ‘정말 다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건가요?’, ’다시 써보려고 했는데 너무 아쉽네요.’, ‘최선을 다해 지켜보겠습니다.’ 등 안타까움을 표현한 회원들의 댓글이 줄을 잇고 있었다. ‘삐사모’는 삐삐 사업자들의 사업 중단이 이어지자 다음 아고라 청원운동과 언론사 접촉 등을 통해 삐삐의 소리 없는 사라짐에 항의해왔다.
잃어버린 아날로그 감성을 찾아서
전화를 받을 때까지 조급하게 울려대는 휴대전화와 비교했을 때 삐삐에는 기다림과 여유의 미학이 있다. 즉각적으로 응답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상대적으로 덜하기 때문이다. 삐삐를 친 쪽에서는 여유 있게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고, 호출을 받는 사람 역시 자신의 시간을 크게 방해 받지 않을 수 있었다.
또 삐삐는 받는 사람 측에서 반송되는 정보가 없으므로 개인 정보 유출의 우려가 적은 편이다. 매일 쏟아지는 각종 스팸 문자와 광고전화, 사생활 노출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보면 과거 삐삐는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는 온전한 나만의 시간과 삶을 선물해주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음성사서함에 남겨진 음성메시지를 확인하는 일은 설렘의 연속이었고, 어렵사리 전화기를 찾아 마침내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의 반가움은 언제 어느 때고 편하게 통화를 할 수 있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따뜻한 안부 인사를 지금처럼 무성의한 두 줄의 단체문자로 대신하는 일도 없었음은 물론이다.
어쩌면 지금 삐삐를 그리워하는 우리들은 단순히 과거를 추억하는 것을 넘어 조금은 모자란 듯 해도 진심을 전달하기에는 손색이 없었던 아날로그만의 여유와 설렘,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한 소통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기술의 발달이 가져다 준 생활의 편리함만큼이나 우리는 많은 대가를 지불했다는 것을, 너무 쉽게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때인 것 같다. Ahn
대학생기자 김은영 / 이화여대 중어중문학과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을.
조금 느리더라도 함께 걷는 세상을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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