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97>에 너도나도 응답하다
최근 종영된 <응답하라 1997>의 인기 비결은 “응답하라 90년대!”라는 신호에 90년대에 청춘을 보낸 이들이 “나 여기 있어!”라며 응답하고, 90년대 문화를 접하지 못 한 학생들 역시 수신호를 보며 그들과 일체가 되어 90년대 문화에 열광했기 때문이다.
90년대는 그다지 멀지 않은 옛날 같다. 그러나 디지털 기기가 급속도로 발전하고 사회가 변화하는 것을 보면, 아날로그와 디지털 시대의 경계에 위치해 있던 그때 그 시절은 어쩌면 우리 기억 속에서 금방 잊힌 먼 옛날인지도 모른다. 가깝다고 여겨졌지만 어느새 먼지가 켜켜이 쌓인 삶의 뒤뜰로 물러나 있었던 90년대, 그때의 추억을 조망한 ‘8090 복고 열풍’이 일고 있다.
‘복고 열풍’은 ‘그때가 좋았지’라는 사회적 심리가 유행처럼 번지는 것이라고 한다. 90년대를 이르는 X세대는 실로 풍요로운 환경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덕분에 고등학생 시절에는 대학입시의 압박을 받는 대신 H.O.T.와 젝스키스의 음악에 미쳐있었고, 대학생 시절에는 취업을 위한 봉사활동이나 학점, 영어 공부 대신 사랑과 청춘에 몸을 바쳤다. 그들은 풍부한 물질적, 문화적 바탕 아래서 삶에 대한 고민으로 아파했고, 그런 그들에게 누군가가 빨리 앞으로 나아가라며 다그치지도 않았다.
그러나 “흔들리고 아파할지라도 우리에겐 밝은 미래가 있겠지”라는 그들의 낙관적인 희망은 오늘날 실망, 아니 절망으로 바뀌었다. 풍요롭고 감성적이었던 시대는 가고 그들은 생산의 최전방에서 ‘더 빠르게, 더 많이’를 요구받으며 채찍질 당하고 있다. 갈수록 대학 입시도, 취업도 힘들어지고, 취업을 한다고 해도 평생직장을 보장받을 수 없다. 이런 팍팍하고 고달픈 시대에 30대는 ‘좋았던 그때’를 추억하는 것이다.
30대는 문화를 향유하고 소비하는 계층이 되어 그들의 추억을 소비한다. 옛 첫사랑의 아련한 추억을 떠오르게 하는 ‘건축학 개론’이 엄청난 관객을 모으며 흥행에 성공했고, <응답하라 1997> 역시 케이블 방송임에도 5%의 시청률을 기록하는 등 흥행몰이 중이다. 7080 세대의 감성을 자극해 인기를 모았던 <써니>가 등장한 지 오래지 않았다. 이제 90년대 세대, X세대라고도 불렸던 그들의 문화까지도 복고가 된 것이다. 이렇게 2012년은 풍요로운 시절의 통통 튀는 X세대 문화를 그대로 재현해낸 ‘8090 복고 열풍’ 중이다.
디지털 기기로 90년대를 추억하다
아침에 지하철을 타고 가다 주위를 둘러보면 열에 아홉은 다 고개를 숙여 양 손으로 붙잡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이렇게 대중화한 스마트폰은 어찌 보면 PC, 전화기, 게임기, MP3, PMP 등 우리가 이제까지 이용해왔던 모든 디지털 기기들을 한 곳에 모아놓은 기계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어디를 가나 스마트폰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는 지금에 비해 과거 90년대 우리는 어땠을까?
90년대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교차하는 시점이었다. 때문에 X세대는 그들의 전 세대나 지금과는 달리 아날로그적인 감성과 세련된 감각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응답하라 1997>은 ‘오빠’들에게 열광했던 90년대 팬 문화를 그려냈다는 점에서 공감을 얻기도 했지만, 더 나아가서 90년대 여러 디지털 기기나 문화를 ‘깨알같이’ 재현해내고 있다는 점에서도 공감을 얻고 있다.
실제로 추억하는 90년대는,
좋아하는 가수를 미디어를 통해서는 쉽게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잡지가 큰 인기를 끌었다. 잡지 매체로는 틴에이저와 주니어가 큰 인기를 끌었다. 방송이나 라디오에 사연을 보낼 때 지금처럼 인터넷이나 휴대폰 문자로 보냈던 것이 아니라 엽서에 정성들여 보내느라 힘들었지만 나름대로의 추억이 있었다.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못 보면 지금처럼 다운받을 수가 없어서 꼭 비디오 녹화를 했다. 제대로 녹화가 안 되는 날은 어찌나 화가 나던지. 삐삐는 아이들이 많이 쓰는 015나이텔을 사용했었다. 사서함에 녹음된 것을 듣기 위해 커피숍을 가기도 했다. 그 당시 커피숍은 테이블마다 전화기가 하나씩 있었고 전화가 무료였다. 그 당시 PC통신은 노래 한 곡을 다운 받는 것도 오래 걸렸다. 압축파일이 없었고 RM(리얼 비디오) RA(리얼 오디오)파일 형식이었기 때문이다. 인기 있던 게임으로는 프린세스 메이커가 있었다.
<출처: http://sugarcat.net>
PC통신 시절, 아날로그적 감성과 디지털 기술이 만났다
인터넷 등장 이전 컴퓨터 통신 방식은 천리안, 나우누리, 하이텔, 유니텔과 같은 PC통신 방식이었다. 전화선을 이용해서 접속했기 때문에 컴퓨터를 하고 있으면 집전화가 걸리지 않았다. 요금도 꽤 비싸 한 달에 꾸준히 1~2시간 컴퓨터를 하면 거의 20~30만원의 전화세가 나왔다. 엄마 몰래 컴퓨터를 오래 하다 야단맞는 에피소드가 TV의 단골 소재로 등장하기도 했는데, 그 정도로 PC통신은 당시 젊은이에게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 천리안 Ⓒ 블로그 ‘마케팅 탐구생활’
▲ 하이텔 대화실 Ⓒ 블로그 ‘쿨미의 추억창고’
파란 화면 안에서 사람들은 낯선 사람들에게 진로, 사랑 등의 고민을 밤새 털어놓기도 했고, 사회문제나 문학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게임기 동호회, 애니메이션 동호회 등 여러 동호회가 PC통신 서비스 업체의 지원을 받으며 활발하게 활동했고, 판타지 소설 동호회에서 연재되던 소설이 실제로 출간되는 등 동호회 문화는 사회 전반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창작 연재란’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이영도 씨의 ‘드래곤라자’는 막 뜨기 시작한 온라인 게임에도 영향을 줬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 역시 PC통신에서 연재됐던 소설이 원전이다.
PC통신에서 사람들은 여러 게시판을 통해서 게임 공략을 주고받았고 서로의 작품을 공유했고 여러 생각들을 나눴다. 동호회, 채팅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던 PC통신 공간은 악플이 난무한 지금에 비해 매우 건전했고 또 소소했는데, 이것이 바로 90년대 PC통신을 추억하는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삐삐에서 PCS폰까지, 느림이 주는 설렘
삐삐로 온 음성전화나 전화로 호출한 사람을 찾기 위해 공중전화 앞에 길게 줄을 서 있는 모습은 90년대의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삐삐는 그만큼 일반인뿐 아니라 학생 사이에서도 대중적이었다. 486(사랑해), 1004(천사)와 같은 의미심장한 번호가 뜨면 두근두근한 마음을 움켜쥐고 공중전화로 뛰어가던 시절. 서투른 고백을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이 대신해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주던 시절. 그 시절은 지금보다 분명 빠르지는 않았지만,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의 시간 격차가 주는 기대와 설렘이 존재했을 것이다.
▲ 삐삐 Ⓒ 블로그 ‘Wind'
1998년 고가의 핸드폰에 비해 단말기 값과 통신요금이 저렴했던 시티폰이 등장했다. 시티폰은 발신전용 단방향 통신으로 삐삐와 동시에 들고 다니며 공중전화 대신에 수신된 연락처로 전화를 걸거나 음성 메시지를 확인하는 것이 주된 용도였다. 그러나 기지국에서 최대 반경 150M~200M 내에서만 통화가 가능하다는 치명적인 단점으로 곧 사라지게 됐다.
▲ 시티폰 광고 Ⓒ 블로그 ‘펀펀스토리’
곧이어 018, 016, 019 번호였던 PCS폰이 등장했다. PCS폰이란 PCS라는 기지국이 있어 기지국에서 수신해서 전화해주는 현재와 같은 전화 방식이다. 초기 PCS폰은 버스 안이나 지하에서 잘 터지지 않았으며 무게와 두께가 상당해 불편했다. 그러나 단음 플립형, 40화음 폴더형, 64화음 컬러 슬라이드형 등 기술적 보완을 갖춘 핸드폰들이 차례로 출시되어 이러한 단점들을 극복했고, 해마다 발전을 거듭하며 지금의 스마트폰까지 오게 됐다.Enjoy! 90년대 우리가 열광했던 것들
컴퓨터 게임이 발달한 지금과는 달리 주로 오락실에서 게임을 했던 1997년, DDR이 출시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버터플라이의 스마일이라는 곡을 모든 학생들이 흥얼거릴 정도였다.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장판 DDR이 나왔고, 오락실뿐 아니라 집에서도 컴퓨터나 TV에 연결해서 게임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DDR의 인기를 증명하듯 하이텔에서는 ‘비트동호회’, 천리안에서는 ‘DDR를 사랑하는 사람들’ 등 다양한 동호회가 생겼다. 동호회에서 다양한 음악을 공유하기도 했고, 멋지게 출 수 있는 일종의 ‘족보’ 등을 나누기도 했다. 초보자 사이에서는 ‘버터플라이’, 중급자에게는 ‘파라노리아’ 게임 BGM이 인기 있었는데, 국내 가요 중에서는 이정현의 ‘와’가 가장 완성도 있다고 평가받았다.
▲ DDR Ⓒ 블로그 ‘쿡쌤의 감성 충천 세상 유랑기, On the Road’
당시 인기 있던 휴대용 게임기의 종류로는 테트리스, 다마고치, 구술미 등이 있었다. 그 중에 특히 일본에서 만든 다마고치가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학생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 다마고치는 일본어 다마고(달걀)와 영어 워치(시계)의 합성어로 휴대용 디지털 애완동물을 의미한다. 다마고치에 달린 3개의 버튼으로 음식 주기, 놀기, 배설물 치워주기 등을 하며 가상 애완동물을 키우는 게임이었다.
한창 다마고치 열풍이 불 때, 쉬는 시간은 띡띡거리는 효과음과 다마고치 배틀로 시끄러웠다. 심지어 아이들이 다마고치로 인해 수업에 집중하지 못 하자 1997년 5월 30일 교육부는 초중고교에 다마고치 반입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또 다마고치가 죽거나 게임이 자기 뜻대로 안 될 때면 언제나 리셋 버튼을 불러 새로운 동물을 키울 수 있었기 때문에 비록 가상 동물일지라도 생명경시풍조를 조장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다.
▲ 다마고치 Ⓒ 블로그 '하람이의 나나우리펫★’
90년대는 ‘가요계의 르네상스 시대’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대중문화가 발달한 시대였다. ‘열여덟, 오빠들은 내 삶의 전부였다’라는 <응답하라 1997> 포스터의 문구처럼 H.O.T.나 젝스키스 ‘오빠’들을 열광적으로 좇아다니는 ‘빠순이’도 이때 탄생했다. 이들의 노래는 워크맨과 CD플레이어로 퍼져나갔다.
처음에는 테이프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워크맨(마이마이)이 인기를 끌었다.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계속해서 되감아 들어 테이프가 늘어나거나 중간에 씹히는 일이 다반사였다. 나만의 음악 테이프를 만들어서 선물하거나 라디오 음악을 녹음하기도 했다. 쉽게 음원을 받아 들을 수 있는 지금과는 달리, 당시에는 음반 매장에 줄을 서서 테이프나 CD를 얻어야 했다. 곧이어 CD플레이어가 출시됐는데, 테이프보다 CD가 더 싸고 음질도 좋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이용했다.
▲ 워크맨 Ⓒ 블로그 '파나소닉 웰빙라이프'
손 하나만 까딱해도 지하철이나 버스 노선 정보부터 실시간 뉴스까지 알 수 있는 요즘, <응답하라 1997>은 불편했지만 소소한 낭만과 따뜻함으로 가득 찼던 그 시절 추억 속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쉼 없이 돌아가는 생산 전선 안에서 그리고 끊임없이 토해내는 정보더미 속에서 잠시 벗어나, 지친 머리를 쉬게 하는 찰나의 휴식이 바로 ‘예전을 추억하는 순간’이 아닐까?
우리는 기억 속에 파묻혔던 그 시절을 다시 추억하고 싶어한다. 세이클럽은 최근 전화 모뎀 연결 소리와 파란색 채팅 화면을 제공하는 '추억의 PC통신' 서비스를 시작했고, 카카오톡은 삐삐톡(삐삐용 숫자로 암호를 주고받음)을 제공하고 있다. 풋풋하고 따스한 아날로그적 감성으로 2030세대에게는 추억을, 10대에게는 새로운 재미를 선사한 <응답하라 1997>. 훗날 ‘응답하라 2012’가 나온다면, 그때 나는 지금을 어떻게 추억하고 있을까? Ahn
대학생기자 김가윤 /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대학생기자 허우진 / 수원대 컴퓨터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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