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초 안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보라!” 박웅현 ECD 명함의 뒷면엔 ‘진심이 짓는다’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2010년 ‘올해의 광고상’을 받기도 했던 아파트 광고의 카피다. 광고주를 위한 배려(?)냐고 장난스레 물었더니, “명함을 받는 사람이 2011년의 박웅현을 기억할 수 있도록 최근에 작업한 카피를 넣은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카피라이터에게 카피란 마치 또 다른 이름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웅현 ECD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사람을 향합니다(SK)’ ‘넥타이와 청바지는 평등하다(KTF)’ ‘현대생활백서(SKT)’ 같은 카피들을 들으면 “아! 그 광고 만든 사람!”하고 무릎을 치곤 하지 않던가.
▲ SK ‘생각이 에너지다(2007)’ TV광고 캡쳐 화면. 박웅현 ECD는 8년 전에 읽었던 책의 한 구절인 ‘나는 하나의 사과로 파리를 놀라게 하리라’에서 영감을 얻어 이 광고를 제작했다. <출처: TVCF> ▲ 청바지, 스니커즈, 귀걸이까지. 박웅현 ECD의 패션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트렌디한 ‘광고인’의 전형에 가깝다. 하지만 그의 광고는 유행보다는 인문학적 깊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출처: 다음 책>
이런 미션이 주어진다면 과연 몇 명이나 성공할 수 있을까? 더구나 그 수단이 ‘광고’라면 가능성은 더욱 줄어들 것이다. 그런데 여기, 15초를 넘어 수 년간 기억되는 광고를 만드는 사람이 있다. 바로 TBWA 박웅현 ECD(Executive Creative Director) 이야기다.
신사동 가로수길에서 그를 만났다. 두 시간여의 인터뷰를 마친 뒤, 광고인이라기보다는 인생 선배를 만났다는 느낌이 더 진하게 와닿았다. 많은 이들이 왜 그를 인터뷰이로, 강연자로, 멘토로 만나고 싶어하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불안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 박웅현 ECD는 ‘가장 느려 보이는 길이 사실 가장 빠른 길이다’라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금 확인해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그와, 그의 광고가 우리에게 많은 위안과 즐거움을 주길 기대하게 됐다. 그와 나눈 대화를 그의 카피들과 함께 정리해 보았다.
본업인 광고 외에도 저술, 강연, 인터뷰 등으로 박웅현 ECD의 하루는 바쁘게 돌아간다. 이쯤 되면 그를 성공한 광고인이라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그러나 사실 광고인 박웅현의 출발은 ‘실패’에서 비롯되었다. 신문방송학과 동기들이 그랬듯 언론사 시험을 봤고, 전부 떨어졌다. 광고는 그에게 최선이 아닌 차선책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광고를 좋아하진 않았어요. 만약 방송국 시험에 붙었다면 PD가 됐을 거고, 신문사 기자가 됐을 수도 있고. 그런데 인생이라는 게 내가 원하는 대로 다 되는 것도 아니고. 대학생들에게도 많이 이야기를 하지만, 자기가 생각하는 직업군의 스트라이크 존을 넓혀 놓아야 편하다고 생각해요. '나는 광고가 아니면 죽는다' 이건 말이 안 된다고 봐요. 저는 어떤 직종을 갔어도 행복했을 것 같아요.”
입사 초기의 자신을 ‘지진아’라고 회상할 만큼, 광고인으로서의 출발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회사를 그만두고 기자가 되려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고민이 깊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가 계속 광고계에 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왜 광고를 못 놓느냐. 먹고 살려고 못 놓는 게 제일 크고요. 그렇다고 이 직업은 영 매력이 없느냐 하면 그건 아니에요. PD는 PD의 매력이, 작가는 작가의 매력이 있겠지요. 광고는 광고의 매력이 있는 거고 전 그 매력이 좋아요.”
그러고 보면 ‘진심이 짓는다’라는 카피는 박웅현 ECD 자신에게도 썩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남들보다 빠르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시작이었지만 따뜻함이 배어있는 그의 광고는 사람들의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 그렇게 느리지만 정직하게, 박웅현은 ‘브랜드 건축가’로서 자신의 입지를 다져 나갔다.
세대를 넘어 모두가 공감하게 만드는 ‘박웅현 광고의 힘’은 인문학적 소양이다. 박웅현 ECD는 평소 강연과 인터뷰 등에서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지난 해에는 <인문학으로 광고하다>라는 인터뷰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이 날 인터뷰에서도 그의 ‘인문학 예찬론’은 계속되었다.
“요즘 후배들을 보면 경쟁률이 워낙 높다 보니, 27살 때의 저보다 뛰어난 것 같아요. 영어도 잘하고 프리젠테이션도 잘하고. 다만, 요즘 청소년들이 체격은 커졌는데 체력은 떨어졌다고 하잖아요. 그런 것처럼, 조금만 길게 이야기를 해보면 깊이가 없는 경우가 많아요. 물론 자신을 포장하는 능력도 중요하지만, 전 생각의 깊이가 있는 친구들이 좋아요. 그게 인문학적인 거죠. 사람과 사회에 대한 이해,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는 능력. 이런 것들은 어떤 책을 얼마나 읽고, 어떤 관심사를 가졌느냐에 달려 있어요.”
인문학의 중요성을 아는 그이기에, 유행의 첨단을 걷는 광고계에 종사하면서도, 박웅현 ECD는 ‘오래된 것들’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좋은 책이 왜 좋은지, 왜 그 음악이 좋은지, 피카소는 왜 위대한지. 그 궁금증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왜 그걸 궁금해하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불과 30년 전에 좋아하던 딥 퍼플은 거의 잊혀졌는데, 400년 된 비발디 음악은 사람들이 왜 계속 듣는 것일까? 난 되게 궁금해요.”
인문학적 감수성이 필요한 것이 어디 광고인뿐이랴. IT기업인 안철수연구소 직원들을 위한 조언을 부탁하자, 박웅현 ECD는 “(인문학적 감수성은) 직종에 관계없이 반드시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유홍준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이런 말을 했어요. ‘문화미와 예술미는 훈련을 통하지 않고는 습득할 수 없다.’ 맛있는 음식과 맛없는 음식은 태어나자마자 생득적으로 구별할 수 있어요. 하지만 피카소와 톨스토이가 왜 대단한지는 훈련을 해야 알지 않겠어요? 그런 훈련을 하면 삶이 훨씬 풍요로워질 거라 생각합니다.”
이쯤 읽다 보면 문득 마음이 헛헛해지는 독자가 분명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미래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힌 평범한 학생이나 직장인에게 ‘인문학적 감수성’이라는 말은 얼핏 공허하게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본질적인 게 무엇인지 자꾸 추구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지금은 힘들겠지만 본질적인 것을 잡고 있다보면 기회는 온다고 생각해요. 물론 허무하죠. 알아요. 허무한 거 진심으로 알겠는데, 그런데도 또 얘기하자면 좋은 책 읽고, 좋은 사람 만나서 대화해 놓아라. 그러면 언젠가는 기회가 온다는 거예요.”
박웅현 ECD와의 인터뷰에서 유난히 많이 등장했던 단어는 ‘상식’이었다. 광고주와의 의견 충돌, 팀원 사이의 갈등, 자녀 교육 문제까지. 모든 문제의 해결책을 박웅현 ECD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의외로 간단히 답이 나온다”는 말로 정리했다. 반칙과 몰상식이 상식처럼 되어버린 세태에서 상식을 지키며 산다는 것이 과연 쉬울까.
“(우리 사회에는) 상식이 많이 없죠. 하지만 상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고요. 그리고 상식 없는 사람들이 많다고 해서 나까지 포기할 수는 없죠. 정치를 하고 법안을 바꾸는 것은 제 능력 밖이고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주변에 이런(상식적인) 이야기를 퍼뜨리는 수밖에 없어요. 나의 긍정적인 생각에 동의를 구하고, 비상식적인 사람을 만나면 설득을 하고 싸울 것이 있으면 싸우고. 후배가 ‘우리 애가 유치원에서 누구한테 졌어’ 하면 ‘왜 경쟁 중심으로 생각하느냐’ 이런 식으로. 주변을 바꿔 나가는 수밖에 없어요. 트위터 RT(Retweet)하듯이.”
상식을 전파하는 박웅현의 또 다른 무기는 광고다.
“광고에 성 차별적이거나 성 역할을 왜곡하는 듯한 뉘앙스가 있으면 회의실에서 자르거든요. 그런 게 제가 해야 하는 역할인 것 같아요. 맞춤법 틀린 광고, 물신주의 부추기는 광고도 만들고 싶지 않아요. 자꾸 그런 게 퍼지면 안 되니까. 나는 내 일을 올바르게, 잘하고 싶어요.”
광고인 박웅현이 아닌 ‘아빠’ 박웅현 역시 상식을 지키기 위해 애썼다. 한때, 그의 딸 박연 양 역시 다른 아이들처럼 선행학습에 매달린 적이 있다. 몇 달 간 아내를 설득한 끝에 겨우 경쟁 위주의 교육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단다. 자녀 교육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박웅현 ECD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내가 낳았지만 아이는 내가 아니라 다른 인격체일 뿐이지. 왜 아이의 직업을 부모가 선택해야 하나요?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조언해 줄 수는 있지만, 판단은 아이가 해야지요. 지금 이 이야기, 상식적이지 않나요? 돈 많은 직업이 반드시 행복하지는 않다는 것은 상식 아닌가요?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보람을 못 느끼면 얼마나 힘들어요. 그런데 그걸 왜 아이한테 강요하는지 모르겠어요. 어느 인터뷰에서 ‘부모님들께 한 마디 해주세요’ 라고 부탁하길래 저는 ‘자식들 좀 덜 사랑하세요’라고 했어요.”
박연 양은 선행학습 대신 책과 음악을 접하며 성장했다. 박웅현 ECD의 표현대로라면 ‘엽기적인 아이’가 된 딸은 이제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다. 지난 해에는 아버지의 책 제목을 패러디해 <인문학으로 콩갈다>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이 정도면 “네가 무엇을 하건 생각하는 힘을 길러라”라던 아버지의 잔소리(?)가 꽤 먹혀든 것 아닐까. Ahn
사진. 사내기자 황미경 / 안철수연구소 커뮤니케이션팀 부장
대학생기자 차승학 / 중앙대 사회학과
Don't bother just to be better than your contemporaries or predecessors. Try to be better than yourself. - William Faulkner의 말처럼 '지금의 나'를 넘어서기 위해 하루하루 노력하는 안철수연구소 대학생기자 차승학입니다.
'파워인터뷰 > 명사 인터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치유하는 만화가 하일권 직접 만나보니 (2) | 2011.05.31 |
---|---|
만화가의 눈으로 본 좀비PC의 서늘한 공포 (2) | 2011.05.13 |
오케스트라의 강마에와 기업 CEO의 공통점은 (2) | 2011.03.30 |
베토벤 바이러스 서희태 음악감독 직접 만나보니 (1) | 2011.03.24 |
안철수연구소 촬영 온 김제동 선행에 놀랐다 (30) | 2011.0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