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보이체크에서 21세기 88만원 세대를 보다

문화산책/컬처리뷰 2011. 10. 2. 08:04

이 연극은 폴란드 출신의 세계적인 거장, 타데우시 브라데츠키 연출의 <보이체크>란 작품으로 원작은 게오르그 뷔히너라는 독일 문학사 상 보기 드문 천재적 작가가 남긴 희곡이다. "어렵다" 혹은 "어려워 보인다"라는 반응을 일으키는 작품 소개다.

주제 의식과 높은 문학성이 이 작품의 미덕이지만, 특유의 무거운 분위기는 아무것도 모르고 간 관객에게는 지루함을 유발할 수 있다. 고로, 사전적으로 줄거리와 대강의 정보는 알고 가는 것이 가장 좋겠다. 그것마저 시간 없어 못 하는 관객이라면 "우리 현대 사회의 88만원 세대를 주인공에 이입하고 보라"고 말하고 싶다.
19세기 작 <보이체크>는 프롤레탈리아 계급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역사상 첫 연극이다. 가진 것이라곤 노동력밖에 없는 사회 하층 계급. 끊임없이 발을 굴려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이지만 항상 무언가 부족하고 억울하며 서글프다. 그리고 당시처럼 명시적으로 나뉘지만 않을 뿐, 소수의 상위 1%가 이렇듯 평범한 다수에 군림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언젠가 읽었던 뷔히너의 문학집 중 미완으로 남겨져 있던 <보이체크>란 작품을 읽고 처음엔 뭐지? 했다. 그러다 점점 마음 속에 강렬히 각인되는 것은 결국 이 작품에 시대를 초월한 문제의식이 담겨 있기 때문이란 생각도 들었다. 비록 19세기에 쓰인 미완의 작품이지만 '보이체크'는 개인의 비극과 착취의 구조를 절묘하게 배합하면서 현대인의 불안함을 섬뜩하게 포착한 문제작이다. 신자유주의가 활개친 지난 10여 년 동안 뷔히너의 '보이체크'가 유난히 자주 공연된 배경에는 이런 이유가 작용했을 것이다. 게다가 미완성 희곡이 갖는 비약과 파편적인 구조는 그동안 여러 연출가의 예술적 상상력을 불태우는 동인으로 다양하게 작용해 왔다.
연극 <보이체크>는 1836년 당시 실업 상태에 놓여 있던 41세 이발사 보이체크가 46세 과부를 찔러 살해한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작품이다. 이발병인 보이체크는 항상 바쁘다. 이발하느라 바쁘고, 실험용 대상이 되느라 바쁘고, 돈을 벌어 마리와 아이를 먹여 살리느라 바쁘다. 그가 사는 세상은 의사(지식층)와 소장(권력층)이 지배하는 세상이고 인간을 인간이 아닌 기계적 도구로 구속하는 세상이다. 의사는 보이체크를 단순한 실험 대상으로 바라보고 그를 '가장 하등한 인간'이라 정의내려 삼시 세끼 완두콩만 먹을 것을 명한다. 며칠 내내 보이체크가 완두콩만 먹고 결국 환청과 환영에 시달리고 정신이 이상해짐을 호소하자 그는 대단한 발견이라며 외친다.
"보이체크는 이제 당나귀야!"
 
설상가상으로 그의 여자인 마리는 군악대장과 바람을 피운다. 유일한 삶의 이유인 마리가 자신을 배반했다는 생각에 그는 절망에 빠지고 결국 칼을 들게 된다. 즉, <보이체크>는 순수한 인간이 비인간적 사회에 의해 어떤 식으로 비극을 맞는지를 집요하게 탐구하는 작품이다. 특히 본 연극에선 인간을 위한 사회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상위에서 군림하는 사회를 상징하는 다양한 구조물이 무대에서 구현된다.
국립극단이 올린 <보이체크>는 현대가 만들어낸 사회의 가장 하등한 인간을 무대로 불러냈다. 놀랍게도 19세기에 만들어진 이 작품은 21세기인 지금, 우리가 봐도 공감이 될 만한 문제의식이 내포되어있다.

두 개의 철제기둥 주변을 쉴새없이 왔다갔다하는 보이체크는 단순한 블루컬러의 하층계급인 노동자 청년이 아니었다. 빚까지 얻어 대학을 졸업해도 사회적 약자인 비정규직과 실업자가 되는 현대의 청년의 모습과 오버랩됐기 때문이다. 보이체크는 2011년을 살아가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의 이야기인 셈이다.
권력과 착취, 비인간적이고 부당한 대우는 지금도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연극은 분명한 주제 의식을 바탕으로 생기와 유머, 페이소스를 이끌어내며 관객과의 호흡에 성공했다.

88만원세대로 일컬어지는 대한민국 20대의 이야기는 더 이상 새롭지도 충격적이지도 않다. 대학교 캠퍼스에 낭만은 사라지고, 그 어느 때보다 학점 관리와 취업 준비에 열을 올리는 소위 한국 역사상 가장 "부지런한" 젊은이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들에게 한국은 노력한 만큼 보상받는 정의가 이루어지는 사회가 아니다. 보이체크에게 세상이 그렇지 않았던 것처럼. 오히려 매일매일 돈을 벌기 위해 발로 뛰는 보이체크에게 소장(권력층)은 '결혼 비용이 없어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음에도 아이가 있는' 보이체크에게 '도덕적으로 살 것'을 강조한다. 그러자 보이체크는 말한다.

“도덕 좋지요. 그렇지만, 우리같이 천한 인간은 도덕을 가질 만한 형편이 못 됩니다. 우리 같은 놈에겐 본능밖에 없습니다. 저도 신사라면 모자도 있고, 시계도 있고, 예복도 있고 그리고 점잖게 말할 줄만 안다면, 저도 도덕적이고 싶습니다. 도덕이란 좋은 거지요. 대위님, 그러나 전 가난한 놈인걸요.”

가족과 사랑은 보이체크에게 절대선이고, 그를 인간으로 만드는 최소의 조건이다. 하지만 그것을 빼앗겼을 때 그는 모든 인간세계의 질서와 도덕을 파괴하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이것이 현대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범죄자, 가장 하등한 인간, 보이체크인 것이다.

"죄는 부정 속의 긍정인가. 긍정 속의 부정인가"

아내를 죽이기 전에 보이체크가 읊조린 이 대사는 세상에서 이방인으로 분류된 한 인간의 무력함을 적나라게 드러낸다.

고전연극이지만 결국 고전적이진 않다. 사회 구조의 부조리로 인해 하루에도 열두 번씩 일어나는 참사들. 바로 내 주변에서, 내 이웃에게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그 대상이 누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매하게도 그것을 느끼지 못 하고 살아간다. 분명 연극 <보이체크>를 보면서 우리는 소장과 의사를 손가락질할 것이다. 하지만 극장 밖으로 나오면 결국, 우리는 이 사회의 소장과 의사와 같은 존재, 그리고 그들로 인해 핍박당하는 우리들에 대해 까맣게 잊고 만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왜 하찮은 그 이발병은 자신의 아내를 죽였는지" Ahn


* 사진 출처 : 인터파크 플레이디비

 

대학생기자 김마야 / 아주대 경제학과


'삐뚤어질 수 있으니 청춘이지'라고 항상 스스로 되새기곤 합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어른'이란 인식이 사회에 맞춰가는 바른 상(像)이라면
저는 아직까지는 사회를 남들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청춘'이고 싶습니다. 저는 오늘도 제 청춘을 버라이어티하게 디자인하는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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