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눈이 멀어버린다면 내 삶은 어떻게 변할까? 티 하나 없이 맑게 갠 하늘, 시릴 정도로 푸른 바다, 여름날 녹음의 싱그러운 초록,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에 걸린 환한 미소... 우리의 삶에서 이런 반짝이는 것들이 한순간에 전부 사라진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변화할까.
1995년 주제 사라마구는 세상 모든 이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모두가 눈이 먼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근원적인 본질과 가치에 대해 심도 있게 담아낸 그의 대표작, 눈먼 자들의 도시. 그가 이 작품을 통해 우리한테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무엇인지 알아보자.
<출처: LiBRO 홈페이지>
눈먼 자들의 도시는 갑자기 눈이 멀어버린 수많은 사람들을 격리시켜 놓은 수용소와 이름 없는 도시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2008년 영화로 제작되어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성찰이 두드러지는 영화라는 큰 호평을 받았던 이 이야기 속에는 현대 문명의 폭력과 인간 사회를 조직화한 권력 구조에 대한 비판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권력과 폭력에 둘러싸인 무력한 한 개인과 수 백, 수 천만 명에 달하는 눈먼 자들의 모습을 번갈아 보여줌으로써, 인간성 본질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을 제기한다.
사건의 시작은 어느 날과 다름없는 낮 동안 일어났다. 신호를 기다리던 일본인 운전자가 눈이 머는 것을 시작으로 운전자의 아내, 그를 진단한 안과 의사까지 전염병이 번지게 된다. 투명한 물에 떨어진 검정 잉크가 순식간에 병 안의 물을 온통 검게 물들이듯, 무서운 속도로 도시 사람들의 눈은 멀어져 간다. 이 재앙의 도시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인물인 안과의사의 아내는 자신의 남편을 돌보기 위해 눈먼 이들을 가둬둔 수용소에 따라 들어온다. 눈 먼 사람들만이 모인 이 곳은 현대 문명사회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르다. 눈이 멀면서 야기된 큰 혼란 속에서 이성보단 본능이 앞서 행동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완전한 동물과 꼭 닮아 있다.
무자비한 폭력으로 지배당한 수용소를 결국 의사 아내를 포함한 8명의 무리가 탈출한다. 의사 아내의 집으로 갔던 이들이 마주친 이웃집 노파는 눈이 먼 채 살아가고 있었지만, 나름대로 안정적인 먹을거리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갖고 있던 먹을거리를 다른 눈 먼 이들과 나누고 싶어 하지 않는다. 무리가 떠난 후 묘사되는 할머니의 심경을 읽었을 땐, 소유욕에 사로잡힌 그녀의 욕심이 현재 우리 가슴 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이기심과 지독히 닮아있단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들은 이미 떠났다. 거의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이곳을 떠나버렸다. 노파는 기뻐해야 마땅했다. 이제 닭과 토끼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갖지 않아도 되니까. 그녀는 기뻐야 마땅한데,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그녀의 멀어버린 두 눈에 눈물이 고인다. 처음으로 그녀는 자신이 계속 살고 싶은 이유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출처: 네이버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다보면 한 가지 인상 깊은 특징이 있다. 도시 사람들은 블랙아웃(Black Out)이 아닌 화이트아웃(White out)의 상태로 눈이 먼다. 보통 시력을 잃어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일 경우, 빛 한 점 없는 깜깜한 방에 가둬둔 것처럼 암흑의 상태다. 하지만 ‘백색의 악,’ ‘백색 질병,’ ‘백색 공포’ 등 다양한 수식어로 묘사되는 이 원인 모를 병은 세상을 온통 하얀 빛으로 보이게 만든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사람들이 눈이 머는 증상은 인간의 ‘소유욕’과 깊은 연관이 있다. 단순히 눈이 멀었다는 사실을 넘어 볼 수 없게 됨으로써 소유하고 있던 거의 모든 것들을 잃게 된다. 우리는 평생 끊임없이 소유하길 갈망하며, 자신이 무엇을 소유하고 있냐에 따라 스스로의 가치와 존재를 확인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토록 중요시 여기며 금전적 가치를 매기는 눈앞의 이 모든 것들이, 정말 그만한 가치가 있는 걸까? 아래 나오는 의사아내의 대사 속엔 이러한 주제 의식이 분명하게 녹아있다.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주제 사라마구는 사람들이 하얗게 눈이 멀어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현재 우리들의 삶은 눈은 떴으나 진실은 볼 수 없는 ‘눈 뜬 봉사’ 의 상태나 다름없다는 질타를 던진다. 현대 사회에 만연한 폭력과 무너진 윤리 의식을 실명이라는 장치를 통해 날카롭게 지적한다. 물질과 그것의 소유가 중심인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우리도 보고 싶은 것들만 보고 있는 눈뜬 봉사인 건 아닐까? 사라마구가 활자를 통해 끊임없이 우리에게 소리쳤던 그의 외침을 주의깊게 귀 기울여 들어보자. 눈앞에 있는 물질의 허상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삶에서 진정한 가치를 지닌 것이 무엇인지 깊이 성찰해보길 바란다. Ahn
대학생기자 윤덕인/ 경희대 영미어학부
항상 배우는 자세를 잊지 말고 자신을 아낄 것
온몸을 던져 생각하고, 번민하고, 숙고하자
'문화산책 > 서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정의 달 맞아 동생에게 선물한 책 세 권 (0) | 2013.05.17 |
---|---|
자영업 꿈에 냉정한 현실 '골목 사장 분투기' (1) | 2013.05.03 |
당연한 것에 질문을 던지라 하는 '시크릿 하우스' (0) | 2013.04.25 |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기억 아웃소싱 시대를 읽다 (0) | 2013.04.14 |
여덟 번째 방, 불안한 청춘에게 건네는 위로 (6) | 2013.04.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