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武) 그리고 문(文) 의 이순신장군

문화산책/서평 2014.07.27 22:56

   최근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군의 배를 물리친 명량해전을 모티브로 한 <명량>이 개봉을 앞두고 있다. 이순신 장군은 100원 동전에도 새겨질 만큼 엄청난 업적을 남기신 분이다. 45번의 전투를 치러 모두 승리로 이끌었고, 한반도에 쳐들어온 왜군의 군량미 수송로였던 전라도 앞바다를 막으면서 파죽지세로 올라오던 왜군들에게 더 이상의 진격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순신 장군은 모든 사람이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업적을 남겼고 최고의 제독이라고 칭송받아 마땅한 명장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이 이렇게 모든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에 무인적 기질을 타고 났던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이순신이란 인물은 문무 모두에 출중했다.

 

 

  "살고자 하면 죽을것이,요 죽기를 각오하면 살것이다."

 

 

= 명문가 집안에서 나온 무관 이순신

 

  이순신의 집안은 조선 명문가인 덕수 이씨집안이었다. 대대로 훌륭한 학자와 관리들을 배출했던 집안이었다. 중종 때는 개혁정치가 조광조 일파에 속했는데,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죽음을 맞이한 이 후 집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후 이순신의 아버지였던 이정이 벼슬길에 오르지 못해 일상생활까지도 어려운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순신은 32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였다고 한다. 무과 급제 당시 그리 우수하지 못한 성적이었고, 좋은 집안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말단 관직을 맴돌다가 왜란 발발 4년 전에서야 죽마고우였던 유성룡의 도움으로 벼슬길이 열리기 시작했고 우여곡절 끝에 전라좌수사까지 올랐다.

 

 

= 활을 잘 다뤘던 이순신 장군

 

  이순신 장군은 쉬는 시간이면 시문을 즐기셨다고 한다. 또한 검술을 익히기 보단 활을 자주 쏘았다. 검과 활 모두 무예를 익히는 일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예로부터  활쏘기는 선비들의 덕목을 기르기 위한 수단으로 중요시 여겨 졌다. 활쏘기는 평정심을 잃으면 과녁에 빗나가게 되기에, 공자님께서도 활쏘기를 통해 평정심을 유지하는 훈련을 중요시 하였다.

 

 『난중일기』를 보더라도 칼을 빼들고 검술을 연마했다는 구절은 없다. 그저 그는 활시위만을 당기고 또 당겼던 활을 든 선비였다.

 

 

 

 

= 조선군에게 군량미를 조달했던 이순신

 

  임진왜란 당시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군자금을 지원해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렇게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하고 전쟁을 하던 이순신에게 조정은 다른 장수들에게 지급할 군량과 일본에 보낼 사신의 배를 만들어라는 명령을 내리기 까지 했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이순신 장군은 모든 전쟁을 승리로 이끄셨다.

 

  원래 수군의 군량은 바닷가에 설치된 여러 고을이 책임지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비상시에는 원활할 리가 없었다. 이를 알고 이순신 장군은 일찌감치 자급자족의 방책을 마련했다. 농지 개발이 제대로 되지 않은 빈 땅을 찾아 수군이 직영하는 농장을 설치했다. 이렇게 군량을 조달할 농장을 경영했으며, 멀리 제주도까지 사람을 보내어 농사지을 소를 사오기도 하고, 전투가 없을 떄에는 고기잡이를 하여 고기를 비축하였다.

 

 

 

  대학생 기자단 배성영 / 한국기술교육대학교 정보통신공학부